오순절의 방언과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오순절의 방언과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오순절의 방언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바울의 책망을 받았다.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오순절의 방언과 같은 성질의 어떤 외국어였는가, 아니면 당시 희랍 신들의 제사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황홀 상태에서의 지절거림이었는가 하는 것을 명확히 규명하기는 어려운 문제다.
바울 자신도 거기에 대해서는 확실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바울은 한결같이 방언에 대하여 "글로싸"란 헬라어를 써서 일단은 구분하는 것을 피했다.
고린도가 국제 무역도시였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이 이곳 저곳에서 주워 들은 외국어를 연결하여 방언이라고 자랑했는지도 모른다. 또 이교신 제사에 익숙했던 이방인 개종자들이 황홀경에서 나오는 지절거림을 교회 안에 가지고 들어와 성령의 은사라고 주장하면서 영적인 능력을 과시하려고 했을 가능성도충분히 있다.
방언도 성령의 은사 중에 하나이기는 하지만,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 중에 방언에 대하여 권면한 내용을 보면,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그것이 외국어이든 열광적인 ’지껄임’이든지 간에 성령의 은사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지럽고 소란스러웠던 방언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고하고 있다.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에 예비하리요…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교회에서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 14 :7, 9,19).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일부 방언 현상을 찬성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어떤 형태의 방언이든지 간에 그 결과가 걱정스럽고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하는 이상, 그것이 성령 충만의 결과가 아님이 확실하므로 바울은 찬성할 수 없었다. 고린도전서 14장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바울은 사실상 고린도 교회의 일부 방언을 금하고 싶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잘라 말했다.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 14 :19). 그것은 그들의 방언은 성령 충만의 결과도 아니며 쓸데 없으니 하지 말라는 책망의 완곡한 표현이다.
- Q: 호세아서에 보면 안식일이 폐지될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admin
- Q: 모든 날이 다 같으니 자기 마음에 정하여 지키면 되지 않는가? admin
- Q: 율법은 요한의 때까지만 유효한 것이 이닌가? admin
- Q: 오순절의 방언과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admin
- Q: 방언의 은사가 사도들의 입에 임했는가, 아니면 청중의 귀에 임했는가? admin
- Q: 오순절에 방언의 은사를 주신 목적은 무엇인가? admin
- Q: 성경에서말하는 방언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admin
- Q: 음식물에 관한 교훈은 아무런 유익이 없는가? admin
- Q: 거리낌만 없으면 아무 것이나 먹어도 되는가? admin
- Q: 믿음이 강한 자는 무엇이든지 다 먹을 수 있는가? admin
- Q: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할 수 있는가? admin
- Q: 음식을 감사함으로 받으면 부정하던 것도 정하게 되는가? admin
- Q: 예수께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admin
- Q: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admin
- Q: 전도서에는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간다고 하지 않았는가? admin
- Q: 구원받은 영혼이 하늘에 없다면,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누구를 데리고 오시겠다는 것인가? admin
- Q: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이란 무엇인가? admin
- Q: 사도 바울이 몸을 떠나 있기를 원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admin
- Q: 계시록 6장의 제단아래 영혼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admin
- Q: 사람이 죽으면 그 신(神)은 하나님께로 간다고 하지 않았는가? admin
- Q: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에는 죽은 후에 서로 교통하지 않았는가? admin
- Q: 예수님 십자가 옆에서 죽어 가는 강도에게 그 날 낙원을 약속하시지 않았는가? admin
- Q: 성경에 보면 영혼은 죽일 수 없다고 되어 있지 않은가? admin
- Q: 다른 교회의 수많은 목사님들과 신학자들은 이런 사실들을 몰라서 일요일에 예배 드리고 있는가? admin
- Q: 날짜 하루 차이가 그렇게 중요한가, 너무 율법적이 아닌가? admin
- Q: 국가마다 시차가 있기 때문에 안식일 시간의 의미가 없지 않은가? admin
- Q: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제7일이 창조 당시부터 지켜온 안식일이라는 확증이 있는가? admin
- Q: 지금도 성경대로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면 안식일에 불도 피우지 말아야 하지 않는가? admin
- Q: 예수님께서 오셔서 사랑의 새 계명을 주셨기 때문에 다른 계명들은 불필요한 것이 아닌가? admin
- Q: 안식일은 유대인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닌가? admin
- Q: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므로, 예수님 십자가 이후에는 불필요한 것이 아닌가? admin
- Q: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admin
-
Q:
예수님은 새계명을 주시고 오직 사랑하라고만 하지 않으셨는가?
admin
A:
마 27 : 37~40 예수님은 십계명을 폐하고 새 계명(사랑의 계명)을 제정하기 위하여 오시지 않았는가?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사랑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구약성경에 제시된 율법을 예수님께서 요약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안다면 우리는 아마 놀랄지도 모른다.
신명기 6장 5절에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밝히고 있으며 레위기 19장 18절에는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하라"고 덧붙이고 있다.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영원한 사랑의 하나님이셨다(렘 31 : 3). 마태복음 22장 40절에 "이 두 계명이(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처음 네 계명은 어떻게 하면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그의 사랑을 명백히 보일 수 있는지 밝히고 있고 나머지 여섯 계명들은 동료라 인간에 대한 사랑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 오셨다"(마 5 : 17).
그는 어떻게 하면 진실된 마음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지를 보여 주셨다. 그는 율법의 의미를 확대키 위해 오셨다(사 42 : 21). 예수님은 어찌하여 사랑이 율법을 완전케 할 것인지를 밝히신다(롬 13 : 10). 그는 또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고 덧붙이고 있다. -
Q:
오순절의 방언과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admin
A:
오순절의 방언과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오순절의 방언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바울의 책망을 받았다.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오순절의 방언과 같은 성질의 어떤 외국어였는가, 아니면 당시 희랍 신들의 제사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황홀 상태에서의 지절거림이었는가 하는 것을 명확히 규명하기는 어려운 문제다.
바울 자신도 거기에 대해서는 확실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바울은 한결같이 방언에 대하여 "글로싸"란 헬라어를 써서 일단은 구분하는 것을 피했다.
고린도가 국제 무역도시였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이 이곳 저곳에서 주워 들은 외국어를 연결하여 방언이라고 자랑했는지도 모른다. 또 이교신 제사에 익숙했던 이방인 개종자들이 황홀경에서 나오는 지절거림을 교회 안에 가지고 들어와 성령의 은사라고 주장하면서 영적인 능력을 과시하려고 했을 가능성도충분히 있다.
방언도 성령의 은사 중에 하나이기는 하지만,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 중에 방언에 대하여 권면한 내용을 보면,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그것이 외국어이든 열광적인 ’지껄임’이든지 간에 성령의 은사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지럽고 소란스러웠던 방언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고하고 있다.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에 예비하리요…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교회에서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 14 :7, 9,19).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일부 방언 현상을 찬성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어떤 형태의 방언이든지 간에 그 결과가 걱정스럽고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하는 이상, 그것이 성령 충만의 결과가 아님이 확실하므로 바울은 찬성할 수 없었다. 고린도전서 14장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바울은 사실상 고린도 교회의 일부 방언을 금하고 싶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잘라 말했다.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 14 :19). 그것은 그들의 방언은 성령 충만의 결과도 아니며 쓸데 없으니 하지 말라는 책망의 완곡한 표현이다. -
Q:
방언의 은사가 사도들의 입에 임했는가, 아니면 청중의 귀에 임했는가?
admin
A:
질문 - 방언의 은사가 사도들의 입에 임했는가, 아니면 청중의 귀에 임했는가? 다시 말해서 사도들이 각각 다른 나라말로 설교를 했는가, 아니면 사도들은 이스라엘 말로 설교했는데 듣는 사람들이 각각 자기 나라말로 들었는가?
[답] 제자들이 이스라엘 말로 설교했는데 듣는 사람들이 각각 자기 나라말로 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즉 청중의 귀에 방언의 은사가 임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기를”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행 2 :6) 들었다고 했으며 제자들이 갈릴리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된 것에 대해 놀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자들이 갈릴리 사람임을 강조해서 그들이 각각 다른 방언을 말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이 제자들을 ”새 술이 취하였다”(행 2 :13)고 조롱한 것을 보아서 방언의 주체가 청중이 아니라 제자들임을 알 수 있다.
베드로 한 사람이 이스라엘 방언으로 설교하면 모든 사람들이 각각 자기들의 방언으로 알아듣도록 그들의 귀에 방언의 은사를 주시는 것이 편리 할텐데 왜 제자들이 각각 다른 말을 하도록 하셨을까? 다음과 같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주체를 확실히 구분하여, 제자들에게 성령의 권위를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쪽은 청중이 아니라 제자들이었다. 성령의 역사가 누구에게 임했는가를 확실하게 드러내기 위한 목적이셨다. 그래서 제자들 자신들이 그들에게 임한 성령의 은사를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간접 체험으로가 아니라 직접 체험을 한 것이다.
(2) 만일 제자들이 이스라엘 말로 설교하고 청중이 각각 자기 나라말로 알아들었다면 신기한 현상이기는 해도 제자들에게는 어떤 권위도 돌아가지 않는다. 제자들의 역할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릴리 사람들인 제자들이, 배운 일이 없는 15가지 이상의 방언으로 설교하자 다 놀라고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임이 확실해졌다. 그러므로 그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했다 - Q: 오순절에 방언의 은사를 주신 목적은 무엇인가? admin
- Q: 성경에서말하는 방언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admin
- Q: 음식물에 관한 교훈은 아무런 유익이 없는가? admin
- Q: 거리낌만 없으면 아무 것이나 먹어도 되는가? admin
- Q: 믿음이 강한 자는 무엇이든지 다 먹을 수 있는가? admin
- Q: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할 수 있는가? admin
- Q: 음식을 감사함으로 받으면 부정하던 것도 정하게 되는가? admin
- Q: 예수께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admin
- Q: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admin
- Q: 전도서에는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간다고 하지 않았는가? admin
- Q: 구원받은 영혼이 하늘에 없다면,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누구를 데리고 오시겠다는 것인가? admin
- Q: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이란 무엇인가? adm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