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27 15:38
제 3과 세계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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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 지혜로 세계를 지으셨고”(예레미야10장 12절).
세상은 어떻게 생겨났으며, 그 가운데 있는 동물과 식물들은 어떻게 생겨났으며, 또 사람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하는 문제는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의 관심거리요 흥미로운 문제가 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사람들의 호기심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올바른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지게 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기초가 됩니다.
이 문제점에 관하여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대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그것을 연구해 보기로 합시다.
세 가지 주장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기 38장 4절).
첫째는, 토마스 헨리 헉스레이가 말한 불가지론(不可知論)입니다. 이것은 먼 옛날의 일을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찰스 다윈이 주장한 진화론(進化論)의 사상인데, 어떤 단순한 형태 혹은 혼돈 상태가 진화의 과정을 밟아서 오늘날과 같이 복잡한 세계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창조론(創趙論)성경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셨다고 믿는 사상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해결하려 함에는 난처한 점이 있습니다. 자연과학은 가상적 이론을 용납하지 않고 오직 실증만을 요구하는데, 이 세계가 생겨난 것을 어떻게 실증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 욥기에는 하나님께서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기 38장 4절)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생기기도 전에 있었던 일을 사람이 어떤 과학적 방법으로 실증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과학자가 실험실 안에서 시험관을 가지고 실험함으로써 증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결과에서 원인을 추리하는 귀납적 방법을 쓰거나 어떤 가정 아래 그것을 풀어 는 연역적 방법을 쓸 수밖에 없는데, 그런 추리나 풀이가 반드시 정확한 결론을 가져올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신빙성 없는 진화론
진화론적 사상은 옛날 헬라 시대에도 주장한 이가 있었으나 근대의 진화론은 지금으로부터 약 100 여 년 전에 영국의 찰스 다윈이 종(種)의 기원(起源)이라는 책을 저술함으로써 온 세상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 진화론은 순전히 가정(假定)을 기초로 한 것으로서, 자연도태(自然淘汰)와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원리, 즉 자연계에 있어서 그 생활 조건에 적응하는 생물은 생존하고, 그렇지 못한 생물은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는 이론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완성된 과학이 아니라 일종의 학설에 불과한 것입니다.
일본 평범사(平凡社) 발행 대백과사전 진화론의 추세(趨勢)라는 항목에는 이러한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진화설은 생물학계에서 널리 또 확실히 신뢰하는바 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오늘날도 여러 가지 점에 회의적 태도를 가진 이들이 적지 않다. 특히 근래에 와서 이런 경향을 가진 사람들이 뒤를 이어 일어나고 있다. 그런 이들의 주장의 요점은, 요컨대 오늘날 진화론을 입증하는 데 사용한 자료가 오늘날에 제공하는 결론을 위해서는 너무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화론이 진리인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진화론에서는 물질 자체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는 설명하지 못하고, 다만 생물이 미생물에서부터 고등동물로 발전하여 마침내 사람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면 세계의 기원(起源)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은 상고할 필요조차 없고 진화론에서도 만족할만한 결론을 얻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세 번째 주장인 성경의 창조설을 검토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일 것입니다. 우리가 과학으로 찾을 수 없는 진리를 철학이나 종교로 찾는 것은 차라리 당연한 태도라 하겠습니다.
창조의 기록
구약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 1장 1절에 기록하기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매우 단순하고 명료하고 확실성 있는 어조입니다. 또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편 33편 6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무슨 이론(異論)이 없습니다. 다만 사실을 사실로 인정했을 뿐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 어떻게, 얼마 동안에 이루어졌는지 상고해 봅시다.
창세기 1장 2절에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태초에는 이 지구가 많은 물로 둘러싸였고 흑암과 공허뿐인 혼돈한 세계였음이 짐작됩니다.
첫째 날
그 첫째 날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세기 1장 4, 5절).
여기서 아침과 저녁이라고 말한 것은 지구의 자전(自轉)으로 인한 1주야(晝夜), 즉 24 시간을 뜻하는 것임을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성경 상 사실을 진화론과 부합시켜 보려는 노력에서, 창세기의 1일이 10만년 혹은 수백만 년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극히 모순된 의견이요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의 권능을 의심하는 태도입니다.
둘째 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창세기 1잘 7절).
즉 공기를 만들어 물을 지면(地面)과 공간(空間)에 나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공간에 증기층(蒸氣層)이 있어, 지구는 한대(寒帶)나 열대(熱帶)의 구별이 없이 기온이 균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증기층은 노아 홍수 때에 제거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오늘날 시베리아의 빙원에서 ‘맘모스’라는 열대산 코끼리의 동결된 시체가 부패되지 않은 채 매몰된 것이 고스란히 발굴된 것은 그 증거의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셋째 날
땅의 물을 한 곳으로 모으고 육지가 드러나게 했으며, 그 육지에는 풀과 곡식과 나무들이 자라게 하셨습니다.
넷째 날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창세기 1장 15절) 하시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즉, 하늘의 천체, 해와 달과 별들이 이 날에 지구와 관계를 맺고 빛을 비추어 주었습니다.
다섯째 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를 각각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여섯째 날
육축과 곤충과 땅의 짐승들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이 모든 생물을 각 종류대로 창조하셨습니다. 만일 한 종류만 창조해도 여러 종류로 변할 수 있었다면 종류대로 창조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 유명한 멘델의 법칙에 의하면, 생물의 종류는 결단코 다른 종류로 변화될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즉 어떤 한도 이상 더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창조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세기 1장 26~28절).
이리하여 사람은 만물 가운데 가장 고귀한 존재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자로 창조함을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고상한 뜻을 자각할 때에 인생관이 달라지고 생애의 발걸음은 자연히 변화를 자져오게 됩니다.
창조 사업의 완성과 안식일
하나님의 창조 사업은 6일 만에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세기 1장 31절). 이와 같이 6일 동안에 창조 사업이 다 이루어지매 하나님께서 제7일을 안식일로 구별하시고 이 날을 창조의 기념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 날을 지킬 때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업을 기억하고, 그분께 예배하고, 그분의 사랑을 감사함으로 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류가 태초로부터 이 귀한 안식일 제도를 계속하여 거룩하게 지켜왔었다면 오늘날의 세상과 같은 불가지론이나 진화론처럼 불신의 사상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창세기는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님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창세기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의 사실을 기록한 서사문(敍事文)이라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일자와 연대와 장소와 인명과 연령과 족보까지도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슨 글이든지 그 글 자체가 자체의 진실성 여부를 잘 드려내는 것입니다.
조물주 이신 하나님의 존재
과학 문명이 발달하고 물질주의가 횡행함에 따라 진화론이 성행하고 무신론적 사상이 널리 퍼졌습니다. 심지어 종교를 미신으로 돌리고 “신이란 것은 사람들이 가상적으로 만들어 낸 개념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특히 유물주의 사상은,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을 실재(實在)한 것으로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의 존재를 부인하지 못할 여려 가지 증거들이 많이 있습니다.
양심이 스스로 증거함
첫째는, 인간의 양심이 스스로 신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더구나 우리 한민족(韓民族)은 옛날부터 하나님을 천지 만물의 지배자로 믿어 왔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본심이 전능하신 이를 신뢰해야만 만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분별해서 알만한 영적 능력을 스스로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은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로마서 1장 19절)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생애에는 비록 눈으로 볼 수는 없으나 마음으로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기이한 경험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경험들을 통하여 사람들은 누구나 신의 존재를 스스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만물을 봄으로
둘째로는, 우리가 만물을 봄으로 조물주가 계신 것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원인 없는 결과는 없고, 모든 것은 그 만든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로버트 잉거쏠’이라는 미국의 한 불가지론자가 ‘헨리 와드’라는 유명한 설교자의 집을 찾아간 일이 있었습니다. 응접실에 들어가니, 거기에는 하늘 성좌(星座)들을 그려서 만든 훌륭한 천구의(天球儀)가 있었습니다. 그가 주인을 향해, “이것 참 훌륭한데요. 누가 만든 것입니까?” 하고 물으니, 주인은 서슴지 않고 “만들긴 누가 만들어요. 저절로 그렇게 되었지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물론 잉거쏠이 그 대답에 만족했을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스스로 한 대답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아름답고 기묘하며 너무도 질서 정연하고 조직적인 천연계를 볼 때 이것이 저절로 우연히 생겼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반드시 어떤 전능한 지혜가 만들어 낸 결과라고 보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고 타당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로마서 1장 20절).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이사야 40장 26절).
과연 위의 두 성경 말씀과 같이 우리가 우주 만상을 볼 때 하나님의 신성과 그 무한하신 능력을 결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성경 말씀이 확증 됨
구약 성경 맨 서두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장 1절)는 아주 확실하고 장중(莊重)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 한 마디가 방황하는 우리의 마음에 얼마나 확고한 기초를 놓아줍니까? 이 말씀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확립시켜 주는 말씀입니다.
참 하나님
우리는 세상의 허다한 신 가운데서 오직 참 신, 곧 참 하나님을 찾아 알고 그에게 경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떤 신이 참 신이요, 참 하나님일까요?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오 사시는 하나님이시오 영원한 왕이시라…그들에게 이르기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 하라 여호와께서 그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 명철로 하늘들을 펴셨으며”(예레미야 10장 10~12절).
과연 세상에 허다한 신이 있으나 이 세계와 만물을 짓지 아니한 신은 참 하나님이 아니요 우리가 존경하고 신뢰하고 경배할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