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사도행전 16장 31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린도후서 6장 2절).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이란 재난이나 질고나 곤궁이나 기타 어려운 환경 가운데 빠져 있는 사람을 도와서 그 어려운 환경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어떤 아이가 우물에 빠져 죽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것을 보고 있던 한 용감하고 의협심 있는 사람이 그 아이가 죽게 된 것을 차마 버려 둘 수 없어 몸소 그 우물 속에 들어가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 아이를 건져내서 살게 하였으면 그 아이는 구원함을 얻은 것이며, 그 의협심 있는 사람은 그 아이를 구원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사업에 대한 좋은 비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단순히 육신적인 어떤 위험에서 건져내는 것 이상의 좀 더 깊고 넓은 의미가 있습니다. 지난 과에서도 연구하였지만,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에 천사는 요셉에게 말하기를“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태복음 1장 21절)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을 죄에서 건져내는 것이 예수의 사명이요 그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말 자체가 ‘여호와는 구원이시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행하신 사업은 인류를 그 죄에서 해방시키심으로 모든 불행에서 구원해 내시는 것입니다.
죄에서의 구원
사람을 죄에서 구원한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죄 즉 죄의 근성, 죄의 습관, 죄의 생활에서 건져내는 것, 둘째는, 죄의 결과로 오는 비참한 운명에서 인간을 건져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인간들은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오는 온갖 불행한 것-불안, 공포, 번민, 실망, 고통, 질병, 전쟁, 사망-을 저주하고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애쓰나 그것의 원인이 되는 죄에 대해서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원인을 제거하지 않고는 그 결과를 없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의 결과인 불행과 비참에서 건짐을 받으려면 먼저 죄의 근성, 죄의습관, 죄의 생활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이 죄 중에서 살고 있다는 인식, 곧 ‘나는 죄인이다’라는 인식이 필요하며, 또 죄에서 벗어나려는 의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의욕이 있다 할지라도 인간이 그 의욕만으로 죄의 근성, 죄의 습관, 죄의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하늘로부터 기이한 감동을 받아 회개함과 중생의 새 경험을 얻어야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결심합니다. “나는 나의 못된 악습을 완전히 끊어버리려고 한다.” 가령 성을 잘 내는 성향이나, 술이나 담배나 마약류를 복용하는 습관, 혹은 도박과 방탕한 생활을 즐기는 등의 여러 가지 악습을 끊어버리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러나 그 결심은 마치 썩은 세끼와 같아서 오래 가지 못하고 끊어져 버리고 맙니다. 속담에 “지어먹은 마음이 사흘을 못 간다”는 말과 같이 됩니다. 죄의 습관에 물든 사람들의 마음은 그 자제력이 몹시 약해져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 결심을 실천할 능력이 없습니다. 죄의 종이 된 자는 하늘로부터 능력을 받기 전에는 스스로 죄를 벗어버리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도 자기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악의 근성을 억제하지 못하여 절망 중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장 24절)고 탄식하였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죄의 근성을 제거해 보려는 사람은 누구나 사도 바울과 같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타고난 죄의 근성이 그로 하여금 선을 행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또 말하기를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로마서 7장 14, 19, 20절)고 하였습니다.
자기 속에 있는 죄의 근성이 자기를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므로 자기는 결국 죄로 죽을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실망한 것입니다.
죄의 결과에서 온 운명
헬라, 즉 오늘날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 박물관에 가보면 매우 기괴한 화석 하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옛날 헬라 사람들이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의 등에 죽은 자의 시체를 지우고 쇠사슬로 결박하여, 그 시체의 독이 그 죄수의 몸에 스며들어 죽을 때까지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다가 죽게 하고, 죽은 다음에는 그 시체를 그냥 한 곳에 장사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화석이 되어 오늘날 아테네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사도 바울은 이러한 참혹한 형벌을 상상하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고 탄식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우리 인간의 운명이 마치 사형수와 같이 멸망하고 말 것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과연 인간은 모태로부터 아담의 불순종의 결과로 말미암은 악한 성질을 유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경향을 타고났으므로, 죄를 범하지 않고 죄와 관련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바울은 이르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로마서 3장 10, 12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은 죄의 결과인 그 삯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에서의 고통과 현실에서의 사망뿐 아니라 장차 있을 둘째 사망, 곧 영원한 멸망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인인 인간은 아무 희망도 없이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망당하고 말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누구나 이러한 자신의 절망 상태를 자각할 때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사도행전 16장 30절)라고 부르짖게 됩니다.
이 말은 옛날 빌립보 성에 있는 감옥의 간수가 스스로 자결하려다가 바울의 만류함을 듣고 그를 향하여 호소한 말이지만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도 역시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까 하고 스스로 반문해 볼만한 말입니다. 이에 대하여 무슨 훌륭한 답이 없을까요? 바울은 그 간수에게 명확히 대답하기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사도행전 16장 31절)고 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 이것이 곧 절망 중에 있는 우리 인간이 구원을 얻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 외에는 우리를 죄에서 건져줄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죄의 유전으로 인한 죄의 근성 때문에 선을 행할 수 없으나, 예수께서는 신성으로서 인성을 쓰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이 당하는 갖은 시련과 유혹과 고통을 당하였을지라도 그것들을 능히 극복하고 홀로 죄 없는 생활을 사셔서 의를 이루셨으며, 죄가 없으시니 우리 죄를 대신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죄를 이길 힘과 능력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이르기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사도행전 4장 12절)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단정한 말입니다. 바울은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로마서 4장 25절)고 하였습니다.
즉 의로우신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불의한 우리를 죄 없는 것처럼 의롭다 하심을 입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죄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이르기를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로마서 5장 10절)고 하였습니다.
이는 우리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나 그와 원수가 되었으나 예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또 예수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새 사람으로 재창조되어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않고 의의 종으로서 의의 생애를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죄에서의 구원이니, 바울이 말하기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에베소서 2장 8절)고 하였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의를 행한다든지 믿는다는 것이 의욕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요 그 의욕을 밀어주는 어떤 힘이 작용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서 죄에 대한 심각한 자각과 믿어야 하겠다는 간절한 욕구가 솟아나지 않으면, 또는 어떤 자극과 깨달음을 주는 동기가 없으면 결코 믿거나 의를 행할 수 없습니다. 비록 자극과 감동을 받아들이거나 저버리는 선택권이 자기에게 있기는 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믿는다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도 은혜로 말미암는 일종의 선물인 것입니다.
믿음은 무엇인가?
그러면 우리를 죄와 죄의 결과에서 구원하는 믿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신약 성경 히브리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1장 1절)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믿음이란 희망하는 일에 대하여 이미 현실로 있는 것처럼 확신을 갖는 것이요, 또 보지 못한 일을 본 것처럼 확인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그렇게 확신하며 확인할 수 있습니까?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브리서 11장 6절).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해야 할 것이며, 그가 당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버리지 않고 돌보시고 보상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신뢰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고 그가 우리 죄를 대속해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그를 우리의 구주로받아들이고, 이 일에 대하여 확신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란 단순히 사실에 대한 확신뿐이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부모가 자기에게 좋은 것을 공급해 줄 것을 알기 때문에 부모에게 전적으로 매달리는 것처럼 그렇게 매달리는 태도입니다. 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로마서 10장 17절)는 성경 구절도 있지만 우리는 들음으로 말미암아 성경 진리를 이해하고, 영적 감동으로 말미암아 들은 바 진리를 확신하게 되어 믿음이 더욱 발전되고 튼튼한 기초 위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 1장 12절)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가 곧 믿는 자인데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위와 영적 능력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믿음 안에서 사는 생활
요한계시록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장 20절).
예수께서는 언제나 우리들 마음문 밖에 서서 우리가 문을 열기만 고대하고 계십니다. 그러다가 문을 열면, 곧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먹고 즐기며 같이 사십니다.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언제나 강조하시기를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복음 15장 4, 5절)고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이란 확신의 생활이며 또한 신뢰의 생활이요, 좀 더 철저하게는 예수와 연합된 생활입니다. 그 안에서 그를 힘입어 살 때, 우리의 무력함은 강력함이 되고, 우리의 불가능은 가능이 됩니다. 나의 악은 없어지고 그리스도의 선이 나를 지배합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장 20절)고 하였습니다. 또 이 믿음 안에서의 생활의 능력에 대하여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장 13절)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능력이 믿는 자의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음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