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27 15:42
제 8과 회개와 거듭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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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누가복음 5장 32절).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사도행전 3장 19절).
회개란 무엇인가?
회개란 쉽게 말해서 과거의 잘못된 생활을 뉘우쳐 고치고 그 방향을 돌이켜 새롭고 바른 길을 택하여 걷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이 회개는 신앙생활에 들어오는 맨 첫 계단입니다. 그러므로 옛날의 선지자들도 백성들에게 회개를 부르짖었고, 침례 요한도 회개의 기별을 전했으며, 예수께서도 그 전도의 첫마디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태복음 4장 17절)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을 전도 사업에 내보내실 때에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라고 전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이는 천국을 받아들이고 얻는 길이 회개에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은 곧 네가 죄인임을 알고 그 길에서 돌아서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그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이사야서 58장 1절)고 부르짖었습니다. 우리가 선한 사람이 되고 바르고 옳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자신의 허물과 죄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하면 고치고 바로잡으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이나 부족을 알려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잘난 줄 알고, 스스로 잘 아는 줄 알고, 자기에게는 결점이 없는 줄 압니다. 그리하여 죄인이라든지 회개라는 말을 들으면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첨하는 말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좋은 약이 입에는 쓰나 병 고치는 데는 이롭고, 충성스러운 말이 귀에는 거슬리나 행함에는 이롭다”는 격언이 있듯이, 우리의 결함을 지적해 주는 것처럼 우리의 생애를 이롭게 해주는 것은 다시없습니다.
우리가 어찌 할꼬?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지 3일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후에 승천하셨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와 작별한 후에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서 모여, 예수의 분부대로 성령께서 능력 부어주시기를 기대하며 10 일간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통회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성심으로 기도한 결과, 거기 모였던 120명의 교인들은 모두 성령의 능력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 베드로는 예수의 수제자였지만 예수께서 잡혀가실 때에는 재판장에 따라갔다가 세 번씩이나 예수를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회개하고 기도함으로 성령의 능력을 받은 후에는 예루살렘성의 많은 군중 앞에서 큰 소리로 외쳐 예수를 증거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사도행전 2장 36절, 3장 14, 15절). 이 말을 들은 모든 자들이 마음에 찔려 부르짖기를“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사도행전 2:37절) 하였습니다.
죄를 지적하여 경고하는 일은 그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사도행전 2장 38절)고 하였습니다. 그 날 오후에 베드로는 성전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여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사도행전 3장 19절)라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유쾌하게 되는 날이라 함은 곧 죄의 속박에서 완전히 건짐을 받을 구원의 날을 가리키는데, 영원한 구원에 참여할 조건은 믿는 것과 회개입니다.
회개와 거듭남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회개는 단순한 뉘우침이나 죄에 대한 인식, 또는 약간의개선이 아닙니다. 그것은 완전한 방향 전환입니다. 지금까지의 생활 상태와는 완전히 다든 생활 상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듭남 즉 ‘중생’이라는 말로도 표현됩니다. 회개와 중생은 동일한 경험의 양면으로, 다만 관점이 다를 뿐입니다. 회개는 사람 편에서 되는 것이요, 거듭남은 하나님 편에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한번은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8장 3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성한 사람에게 어린아이가 되라는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예레미야 13장 23절).
사람이 자신의 노력이나 힘으로 회개한다고 해서 과연 얼마나 개선될 수 있을까요? 앞에 과에서도 말했지만, 자신의 결심이나 맹세는 그렇게 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편에서의 회개만으로는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변화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육이나 수양의 힘을 과신하여 그것이 사람을 개과천선(改過遷善)시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악한 사람을 선한 사람이 되게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 품성을 완전히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학식 있고 도덕적 수양이 있는 사람도 그 마음을 바로잡는 데는 무력함을 고백하고 탄식하였습니다.
거듭남의 경험
그러나 오직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거듭남의 경험입니다. 한번은 예수께서 니고데모라는 유대인 지도자의 방문을 받으신 일이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는 학식 있고 문벌 좋은 훌륭한 인물로, 당시 산헤드린 의회 의원이었는데, 밤에 예수께 찾아와서 가르침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무력함을 바울과 같이 심각하게 느껴보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한복음 3장 5~8).
이 말씀에 의하면, 참된 회개는 곧 거듭나는 것, 곧 어린아이가 어머니 배에서 새로 나는 것처럼 새 사람이 되어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거듭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능력 이상의 능력으로써 사람을 도우셔 새로남을 얻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바울은 이 경험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디도서 3장 3~5절)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새로 나는 경험은 성령의 힘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의인이 올바른 생애를 살려면 거듭남의 경험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미암는 새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회개한다는 말 가운데는 두 가지 뚜렷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믿기 전에 지은 모든 죄의 용서하심을 받는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력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경험이 없으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경험은 제삼자가 볼 수 있거나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바람이 부는 것처럼 그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영적 변화입니다.
새로남의 계단
우리가 이 경험을 얻기 위해서는 몇 계단을 밟아야 합니다.
첫째, 죄를 아는 것. 영국의 유명한 재상 ‘그랏더스턴’은 “근대 생활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그것은 곧 죄를 아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죄를 아는 것, 이것은 개인 생활에서나 사회생활에서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날마다 죄를 물마시듯 하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 깨닫지 못합니다. 죄를 점하고 죄 가운데 살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 모르는 것처럼 딱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모태로부터 죄의 근성을 가지고 나왔고 또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으므로 죄인 아닌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부모를 모르는 자식이 있다면 그 자체가 벌써 죄인 것처럼, 인생을 내시고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한 죄가 없는 것입니다. 다음은 불법이 죄입니다. 하나님을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고 순종하지 않음이 죄인 것입니다. 또 그 다음은, 마음에라도 불의한 생각을 품는 것이 죄요,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행치 않으면 그것 역시 죄가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죄와 상관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둘째, 뉘우치는 것. 자기가 죄인인 줄을 알고 스스로 잘못되었음을 알면 충심으로 뉘우쳐야 하고, 죄 지었음을 슬피 통회해야 합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신자들에게 편지하기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린도후서 7장 9, 10절)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근심이란 마음에 슬퍼하고 통회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새로운 생애를 하기 위한 전환점을 이루는 통회입니다. 이것은 유감되다든지 섭섭하다는 정도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 고통스러운 장면을 생각할 때, 이것이 모두 나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낄 때, 참을 수 없이 일어나는 마음의 감동과 아울러 죄를 미워하고 죄를 원수처럼 가증하게 여기게 되는 감정입니다. 이러한 뉘우침과 통회가 우리의 경험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셨다”(로마서 2장 4절)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적 감동이 아니고는 아무도 이러한 경험을 맛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섭리인 것입니다.
셋째, 죄의 고백. 죄에 대한 절실한 생각과 통회로 마음에 아픔을 느낄 때, 위안과 평안함을 얻는 방법은 곧 죄의 고백입니다. 요한은 그의 편지서에서 이르기를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장 9절)라고 하였습니다. 죄의 사하심을 받는 방법은 극히 간단합니다. 죄를 인정하고, 죄를 통절히 미워하고, 또 그 지은 죄를 숨김없이 자백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사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죄를 고백하는 자는 그 마음의 고민이 평안이 되고, 슬픔은 기쁨으로 변합니다. 그런데 죄를 고백할 때에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결코 지혜스럽지 못하게 죄를 고백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자기만 아는 하나님께 대한 죄는 오직 하나님께만 고백하고 그의 사유하심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피해를 입힌 상대자가 있는 경우에는 그 상대자에게 정중하게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할 것이요, 만일 물질적 손해를 입혔으면 배상해야 합니다. 만일 배상할 능력이 없을 때에는, 자기의 처지를 이야기하고 가능한 한 성의를 표시해서 어떠한 타협을 지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공중(公衆) 앞에 죄를 범했으면 마땅히 공중 앞에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제삼자나 공중 앞에서 폭로하는 일은 결코 아름다운 일이 아니며, 성경의 원칙도 아닙니다.
넷째, 죄에서 떠남. 맨 마지막 조건은 죄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대로, 돌이키는 것이요,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사도행전 26장 29절)는 것입니다. 즉 지금까지의 온갖 죄악적 환락의 길에서 돌이켜서 정반대의 길, 곧 새 생애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죄 사함의 표상과 거듭남의 표상으로써 침례를 받고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여 그리스인으로서 새 생활을 하게 됩니다.
승리의 생활
그러면 한번 회개의 경험을 가진 사람은 죄에 대하여 안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사단은 회개한 사람일수록 더욱 유혹하고 시험을 주어 타락하게 하려고 애씁니다.
그렇다면 이 위험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야말로 새로남의 경험을 얻은 사람이 언제나 명심해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비결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곧 우리의 능력의 근원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거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골로새서 2장 6절). 마음에 예수를 주로 모시고 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곧 나를 죽이고 그리스도가 나를 주관하시게 할 때에 틀림없이 승리의 생활을 계속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