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27 15:45
제 15과 그리스도인과 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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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사도행전 20 장 35절).
우리 생활에 있어 돈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더구나 물질문명이 극도에 달한 오늘날에 있어서 돈의 필요성은 한층 더 절실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돈이면 만사 OK!”라는 유행어가 생길 만큼 금전만능 사상이 오늘날 모든 사람의 마음 가운데 깊이 뿌리를 박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돈에 대한 필요와 돈에 대한 애착이 없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는 돈에 대한 관념이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가르치기를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디모데전서 6장 17절)라고 하였습니다. 돈은 돌아가는 것이요 물과 같이 흘러가는 정함이 없는 것이므로, 그것을 의뢰하고 거기에 소망을 둘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우리 인류에게 공급해 주시기를 좋아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오직 그를 신뢰하라는 말씀입니다. 연세 드신 분들은 제2차 세계대전과 6.25동란의 쓰라린 경험을 통하여, 재물이란 것이 얼마나 신뢰할 수 없을뿐더러 생명의 장애물이 되기까지 하는지를 몸소 느끼고 체험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돈이 본래 악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돈 그 자체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어떻게 얻으며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돈은 선의 편이 될 수도 있고 악의 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돈에 대한 정당한 관념입니다. 돈에 대한 그릇된 애착심과 그것을 부당한 방법으로 얻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돈은 사람이 쓰기 위하여 준비된 것이요 지키기 위하여 준비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마땅히 돈의 지배자가 되어야지 돈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바른 의지력을 가지고 돈을 지배하는 사람보다는 돈에 대한 그릇된 애착심을 가지고 돈의 종이 되는 사람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리고 돈에 대한 그릇된 애착심은 사람을 죄의 구렁텅이에 빠져 들어가게 할 위험성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 점에 대하여 경계하였습니다. 자! 그러면 성경이 돈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를 살펴봅시다.
돈에 대한 올바른 생각
“그러나 지족(知足)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디모데전서 6장 6~10절).
위의 성경 말씀은 이 세상에서 돈을 모아 부자가 되려는 것의 허무함과 족한 줄을 아는 것의 참된 가치를 말한 것이며, 또한 돈을 사랑함이 만악의 근원이 되어 죄에 빠져 들어가게 하는 올무가 된다는 것을 경계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을 위해서는 마땅히 돈을 벌어야 할 것이지만 분수 이상의 사치와 향락과 자기만족을 위하여 돈을 탐해서는 안 됩니다. 돈을 탐할 때 무리한 일을 하게 되고 죄악에 빠지게도 되어 결국 자신을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 기자는 이르기를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언 30장 8, 9절)라고 하였습니다. 일상생활을 유지할 만큼의 돈을 가지는 것으로 족하게 여기는 사람은 참으로 안전하고 행복한 인생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재물과의 관계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편 24:1절).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개 2장 8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시편 50편 10~12절).
세계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가 창조하셨고 또 붙드시니 아무것도 그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만물을 인류에게 맡기고 분부하시기를 “정복하라”,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류는 만물의 관리자로서 그것을 운용할 수 있는 권리만을 가졌을 뿐이요, 만물의 소유주는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쓰시려면 아무것도 쓰지 못할 것이 없으시나 인류에게 관리권을 맡기셨으니, 인류를 통하여 당신이 원하시는 바를 행하도록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불쌍한 자를 돌보며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복음 사업을 위하여 희생하며 헌금을 드릴 의무를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혜와 힘을 주시고 또 기회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재물을 얻을 수 있도록 하십니다. 가령 농부가 논에 벼를 심어 양식을 만드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농부 자신의 힘과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때를 따라 햇빛을 비추시고 비를 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신명기 8장 17, 18절)고 하였으니, 우리 인간이 매일 생명의 능력을 받아 활동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그 은혜를 감사하는 정신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혹은 생각하기를, 내가 오늘날 이만한 재산을 가진 것은 내 힘과 내 노력으로 얻은 것인즉 또한 내 마음대로 쓰지 못할 것인가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부자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재물의 관리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정욕을 채우거나 자기의 교만한 마음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 재물을 함부로 낭비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에게 재산을 그냥 맡겨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십일조와 헌금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는 당신의 사업을 완성하기 위한 자금이 하나님의 재산을 맡은 사람들의 십일조와 헌금의 제도로써 성취되도록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준비하신 근본 목적은 당신의 필요를 채우시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고상하게 하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곧 십일조와 헌금을 드림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에서 악의 뿌리가 되는 탐심을 제거하고 관대한 마음을 가지게 하는 동시에 자신들이 축복을 체험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주일 중 하루를 안식일로 구별하여 지킴으로써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이신 것을 기억하게 함과 같이, 수입의 10분의1을 바침으로써 하나님이 만물의 소유주이신 것을 기억하게 함이 십일조 제도의 근본 목적입니다.
모세가 기록하기를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레위기 27장 30절)고 하였고, 솔로몬은 이르기를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잠언 3장 9, 10절)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마땅히 그 수입의 10분의 1 즉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치되 그것을 맨 먼저 하나님께 바칠 것이니, 이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룩히 구별한 성물이기 때문입니다. 이 제도야말로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만큼 아주 공평하고도 단순한 방식으로 되었습니다.
예컨대 만원을 버는 사람은 천원, 오천원을 버는 사람은 오백원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농사하는 사람은 농사짓는 데 드는 비용 즉 종자, 비료, 일꾼, 농약 등을 위한 비용을 제한 순이익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며, 장사하는 사람은 상품 구입비, 운반비, 인건비, 각종 세금 등의 비용을 제하고 남은 순이익의 10분의 1을 하나님의 복음 사업을 위하여 드려야 합니다. 수확의 많고 적음과 이익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꼭 10분의 1을 드려야 합니다. 부자라고 더하지 않고 가난하다고 덜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확히 10분의 1을 요구하십니다. 그리하여 이 10분의 1로써 하나님께 봉사하는 특별한 직무와 그 직무를 가진 이들의 생활을 공급하도록 계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에는 이것이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되었고,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교회의 전도 사업과 그 종사자들의 생활비로 공급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르기를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린도전서 9장 13, 14절)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도 십일조에 관해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태복음 23장 23절)고 하셨습니다. 이 경우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적 행위를 경고하지만 오히려 십일조의 실행을 소홀히 할까 염려하여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물론 형식적인 십일조가 아니라 정성을 다한 정확한 십일조를 내야 할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교훈을 따라 정확한 십일조를 드렸다면 저들은 물질적 또는 영적 축복을 넘치도록 풍성히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복음 사업은 현재보다 더 확대되고 영혼을 구원하는 추수는 신속히 마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여러 교회가 성경에 지시한 대로 십일조 드리기를 가르치지 않고 기타 방법으로 이기적인 일시적 명예심에 호소해서 헌금하도록 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요, 다시금 예수님의 경고를 받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십일조 외에도 자원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드리는 것을 권장했습니다.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신명기 16장 16, 17절).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궁정에 들어갈지어다”(시편 96편 8절).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당에 나아갈 때에는 반드시 감사하는 예물을 가지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오늘날은 마지막 긴급한 기별을 전해야 하는 때이므로 각 사람은 한층 더 분발해서 희생적으로 헌금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이 이 귀한 하나님의 기별을 받은 기쁨과 특권을 생각할 때, 흑암 가운데서 방황하는 불쌍한 동포들을 위하여 좀더 희생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축복과 저주
십일조와 예물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물의 창조주시요 소유주이심을 승인하는 동시에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정신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주는 것은 곧 사랑입니다. 주는 일을 계속할 때 사랑하는 정신은 더욱 고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사업을 위하여 드리기를 좋아하는 자들을 축복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라기 3장 10~12절).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재산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을 때에는 그는 범법자로서 저주를 받게 됩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말라기 3장 8, 9절).
이스라엘 민족사를 살펴보면 저들이 안식일을 잘 지키고 십일조를 신실히 드리며 성전 봉사에 충성할 때, 즉 그들의 종교가 왕성할 때에는 국가가 번영했지만 그들의 종교가 쇠퇴하여 안식일을 신실히 지키지 않고 십일조도 드리지 아니하여 하나님께 봉사하는 일에 소홀했거나 폐지되었을 때에는 그 나라도 쇠퇴하거나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아 노예로 사로잡혀 가는 운명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위의 말라기의 축복과 저주는 곧 이스라엘 민족의 여러 시대 동안의 경험에 나타난 사실입니다.
또한 구약의 역사를 보면 개인의 생애에서도 이 사실이 현저히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소득의 10분의 1을 하나님의 제사장에게 드렸는데 그는 동방의 큰 부자가 되었으며, 그의 손자 야곱은 빈손을 들고 집을 떠났지만 20년 후에는 많은 가족과 큰 재산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이는 그가 떠날 때 하나님과 약속한 십일조를 성실히 드린 결과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야곱을 축복하신 하나님은 오늘날도 변함없이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하신 그 약속을 지키고 계십니다.
미국의 ‘존 록펠러’는 첫 월급 50불에서 10분의 1을 교회에 바쳤는데 후에 석유왕이 되었고, ‘카네기’도 십일조를 드렸는데 강철왕이 되었으며, 또 비누와 치약으로 유명한 ‘콜게이트’도 최초의 수입에서 정확한 십일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멘소레담’을 처음 만들어낸 ‘H. H. 하이드’도 십일조를 실행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또한 ‘크라이드 하리스’는 가난한 집 아들로 젊었을 때 직공 생활을 하였으나 후에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이 되어 조그마한 상자 제조업을 시작하면서 십일조를 신실히 드렸는데, 그 결과 그의 사업은 해마다 발전되고 확장되어 1960년경에는 700여명의 직공을 거느린 세계 제일의 가구 공장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1963년에 3,000만 불 가치의 공장과 현금 800만 불을 교회에 기부하여 온 세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돈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고 신뢰하는 자를 축복하셔서 10분의 1 이외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많은 예물을 드리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대신 돈만 믿고 돈에 대한 애착 때문에 돈의 종이 되어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행하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의 종말이 얼마나 처참한가를 우리는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왕은 이르기를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언11장 24, 25절)고 하였습니다.
과연 깊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그리고 실천에 옮겨서 하나님의 약속을 체험해 볼 일입니다. 우리가 비록 약간의 금전을 바친다 한들 우리에게 만물을 주시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주신 그 크신 은혜를 만분의 일인들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의 이러한 작은 정성이라도 어여삐 받아주시고 축복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태복음 6장 20, 2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