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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7 15:35

제 1과 인생의 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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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 119편 105절).


  인생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왜 생겨났으며, 어떻게 태어났는가? 사람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사람이 마땅히 가야 할 길은 어느 길인가? 인생이 왜 이리도 괴롭고 어지럽고 모순투성이인가? 이런 수수께끼 같은 문제들이 우리 마음을 번뇌케 하고 어지럽게 하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인생이 너무도 무상하고 괴롭고 허무하기 때문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의 지혜로운 왕 솔로몬은 그 일생을 통하여 온갖 영화를 다 누리고 마음에 원하는 것은 다 해보며 갖은 즐거움을 다 맛보았으나 결국에 가서는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전도서 1장 2∼4절)라고 탄식하였습니다. 또 신약 성경 야고보서의 기자 야고보는 이르기를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야고보서 4장 13, 14절)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두 성경 말씀은 인생의 허무함과 덧없음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솔로몬왕은 영화와 부귀를 한껏 누리고도 끝내는 인생의 허무를 그렇게 느꼈으니, 가난의 밑바닥에서 헐벗고 굶주리며 육신의 고통과 마음의 염려로 어쩔 줄 모르는 일반인들이야 인생의 덧없음과 허무함을 얼마나 더 느끼겠습니까?  
  인간이란 빈부 귀천을 막론하고 태어나면서부터 울며 고생하다가 늙고 병들어 결국은 죽고 맙니다. 이것이 곧 인간이 면하지 못하는 운명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 인간의 허무하고 속절없는 운명을 해결해 줄까요?  
인간의 지식이나 과학이 비록 달세계는 정복한다 할지라도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번민과 죽음의 운명은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이것은 인간 그 이상의 지식, 곧 인간 이상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이에 비로소 종교의 필요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란 인간 이상의 능력자, 즉 신(神)이나 어떤 대상에게 귀의해서 그를 신앙하고 그에게 예배하고 그에게 복을 구하는 일을 말하는데, 종교(宗敎)라는 한자(漢字)의 의미로 본다면 “으뜸되는 가르침”, “근본적인 교훈”이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으로서 마땅히 알아야 할 근본적인 문제, 즉 현실 이상의 영원한 문제를 가르쳐 주는 것이 곧 종교입니다. 사람은 종교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동서 고금을 통하여 사람이 사는 곳에는 반드시 종교가 있습니다. 프랑스의 한 심리학자는 “사람은 종교적 동물이다”라고 말하였는데, 그것은 사람만이 신앙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식욕과 정욕 등 생리적 욕구와 마찬가지로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본능입니다. 제아무리 무신론을 주장하는 사람이라도 위급한 경우를 만나면 자연히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창조하실 때 당신을 사모하고 신뢰할 수 있는 본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만물의 영장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인간에게만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께 봉사하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어떤종교를 믿어야 할까?

  세상에는 종교도 많고 종파도 많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종교나 믿기만 하면 될까요? 비록 길이 다를지라도 결국 도달하는 목적지는 모두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은, 종교는 사회 교화(敎化)를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지 거기에 천국이 있거나 영생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가 단순히 그러한 것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참된 의미로서의 종교가 아니며 교화의 참된 효과도 나타내지 못할 것입니다. 현실 이상의 만족과 희망을 주지 못하고 영원으로 통하는 길을 제시하지 못하는 종교는 참 종교일 수 없습니다.
  지혜로운 왕 솔로몬은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언 14장 12절)고 하였습니다. 어느 종교나 다 참된 길이라고 스스로 말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가르쳐주지 않는 종교는 바로 사망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것이 바른 길이며 생명의 길인지 깊이 생각하고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한 기자는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예레미야 6장 16절)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영원으로 통한 옛적 길(특히 옛적 길이라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품성의 변화를 가져오는 선한 길, 마음의 평안과 안식을 주는 희망의 길이라야 선한 길이요 참 도리요 믿을 만한 종교인 것입니다.
 

가장 권위있는 종교 
  종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 종교’라고 해서 천연물이나 금이나 은, 나무나 돌로 만든 우상을 섬기는 원시 종교요, 둘째는 ‘계시 종교’라고 해서 신의 계시를 받아 이루어진 경전을 가진 종교입니다. 그리고 섬기는 신에 따라서 범신교, 다신교, 일신교로 구분하기도 하고, 그 분포 범위에 따라 민족 종교, 국민 종교, 세계 종교로 구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민족만이 신앙하는 종교보다는 세계적인 종교가 우수한 종교요, 여러 종류의 신을 섬기는 범신교나 다신교보다는 천지 만물의 창조주이신 인격적인 하나님을 신앙하는 종교가 가장 우수하고 발달한 종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이 모든 우수한 조건을 구비한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계시로 된 신구약 성경을 가진 것은 이 종교를 가장 권위있게 만들었습니다.
 


인생의 등불 
  우리 인생은 마치 캄캄하고 어두운 밤에 등불도 없이 더듬어 나아가는 것같이 알 수 없는 운명을 향하여 매일매일 더듬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돌에 부딪치기도 하고 혹은 구렁텅이에 빠지기도 하며 고통과 실망과 번민을 당하는 예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우리의 앞길을 환하게 비추어 주는 등불을 가지고 걸어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 등불이란 무엇인가요?
  옛날 이스라엘 나라의 한 시인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장 105절)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여기서 “주의 말씀”이라 한 것은 곧 성경을 말하는데, 그리스도교의 성경 ‘바이블’ (Bible)이 우리 앞길에 빛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우드로우 윌슨(Woodrow Wilson)은 말하기를 “성경을 읽으면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니, 이는 그대의 마음, 그대의 행복, 그대의 의무의 열쇠가 이것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나는 대통령으로서의 나의 앞에 놓인 문제들을, 내가 성경을 얼마나 충실히 연구하는지 그 비례에 따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미국 FBI 국장이었던 J. 에드가 후버씨는 “성경은 사람에게 완전한 인생을 지시해 주는 확실한 인도자이다. 그것은 영적 양식의 근원이요, 선량한 생활로 인도하는 영감(靈感)이다”라고 하였으며, 아브라함 링컨은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내리신 최상의 선물이다”라고 하였습니다.이상과 같이, 우리보다 먼저 산 위대한 인물들이 그들의 경험을 통해서 성경의 가치를 그렇게 높이 인정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도 성경을 그렇게 가치있게 인정하고 그 내용을 검토하고 그 진리를 연구한다면, 우리 인생길을 아주 안전하고 명랑하게 걸어갈 수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면 다음 과부터 성경이 어떤 책이며 무엇을 말하는지 차근차근 연구해 보기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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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한복음 5장 39절)

  우리는 지난 과에서, 성경은 인생의 앞길을 비춰 주는 등불이라고 공부하였습니다. 과연 성경처럼 우리 인류 역사에 빛을 주고 유익을 끼친 서적은 없으며, 또 이 책처럼 많은 사람이 읽고 오늘날도 계속해서 많은 사람이 읽고 연구하는 책은 없습니다. 그런데 일반인들 가운데 이 성경을 한갓 인간의 윤리 도덕을 말한 수양서(修養書)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세상에 흔한 처세훈(處世訓)이나 금언집(金言集)의 부류가 아니요, 그 이상의 고상한 진리가 포함되어 있는 진주보다도 더 값진 보물입니다. 곧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좌우하는 생명의 말씀이 그 가운데 있습니다.
 

성경의 내력
성경은 본래 따로따로 기록되어 있던 66권의 책들을 한데 모아 성경전서(聖經全書)를 이룬 것입니다. 성경전서는 크게 구별해서 처음 39권을 구약(舊約)이라 하고, 나중 27권을 신약(新約)이라고 합니다. 구약은 주로 예수 탄생 이전에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통해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의 기록이요, 신약은 예수 탄생 이후에 예수를 통해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의 기록입니다. 요약하자면, 성경은 이 세상 처음부터 마치는 날까지의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경륜, 곧 그분의 지극히 공의로운 정의와 무한히 넓고 깊은 사랑을 나타내 보여준 글입니다.
  구약의 원문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고 극히 적은 부분만이 아람어로 기록되었으며, 신약은 원문이 전부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구약은 모세를 비롯한 약 30명의 기자가 기록하였고, 신약은 약 10명의 기자가 기록하였습니다. 그 기자들 중에는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다 있는데, 위대한 제왕으로부터 훌륭한 정치가, 관리, 군대의 장관, 제사장, 학자, 의사, 농부와 목자, 심지어는 어부들까지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기록된 연대는, 구약이 기원전 1500년경부터 400년경까지 약 1100년에 걸쳐서 기록되었고, 신약은 기원후 50년경부터 100년경까지 약 50년에 걸쳐서 기록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구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가 기록된 때로부터 신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이 기록되기까지는 약 1600년의 긴 기간이 걸렸습니다.


모세오경
 모세 오경은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에 모세라는 사람이 기록한 구약 성경의 처음 다섯 권의 책을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상 율법책이라고 일컫는 것으로,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입니다. 이 책은 조상들의 구전(口傳)과 하나님의 지시와 영감에 의하여 기록되었습니다. 특히 창세기의 기록을 볼 때, 그것이 사람의 생각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줍니다. 우리가 깨끗한 마음과 아무 선입견이 없이 순수한 정신으로 창세기를 읽는다면, 그것이 만들어낸 이야기나 소설과 같은 공상적 기록이 아니라 사실에 기초한 것임을 잘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모세 오경은 구약 성경 중에서도 가장 기초되는 것으로, 유대인들은 물론이요 회교도들까지도 자기들의 경전으로 존숭(尊崇)하는 것이니, 세계 인구의 약 절반 정도가 이 오경의 감화와 영향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 오경은 이 세상에서 가장 권위있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의 글
모세 이후로 시대를 따라 여러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예언서들을 기록하였는데, 그들 역시 성령의 감화와 지시를 받아 기록하였습니다. 그중에는 대선지서 5권, 소선지서 12권이 있는데, 이것은 기원전 400년경에 편찬되어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 성경의 일부분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신약 성경에서는 이 책들을 가리켜 ‘선지서’ 혹은 ‘선지자의 글’이라고 일컫습니다.


역사와 시 문학서
구약 성경 가운데는 율법책이라고 일컫는 모세 오경과 선지자들의 예언서 외에도 역사적 기록과 시와 문학적 기록들이 있습니다. 역사적 기록 중에서 주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기록된 사무엘상, 하열왕기 상, 하역대상, 하 등 여러 책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사에서, 하나님의 교훈과 그 명령을 순종하여 지키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되는 경험들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곧 세계 역사의 축도(縮圖)이며, 또한 우리 인간 생활의 거울이기도 합니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서 인간이 경계를 받고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지도를 받아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 사람들은, 그 길이 평탄해서 마치 아름다운 꽃동산을 거니는 것처럼 유쾌했든지 혹은 그 길이 험난해서 가시밭길을 다니는 것처럼 괴로웠을지라도, 그 입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찬양의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그것이 곧 시편과 아가서등의 훌륭한 시와 노래로 나타났습니다. 그 외에도 유명한 솔로몬왕의 잠언과 전도서같이 인생을 반성하고 인생의 길을 선도하는 훌륭한 교훈서와 철학서가 있습니다. 또는 욥기와 같이 우주 만상의 깊은 이치를 말한 것이 있는가 하면, 룻기나 에스더처럼 인정의 순박함과 민족을 사랑하는 열정이 넘쳐흐르는  아름다운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이야기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손이 어떻게 당신의 택한 백성을 재난과 환난 가운데서 보호하시고 구원해 내시는가를 볼 때, 과연 성경은 보통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 하나님의 그 넓고 깊은 사랑의 섭리에 감격을 금치 못하게 됩니다.


신약성경
그러면 신약 성경은 어떤 책인가요?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기록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심을 증거하는 글입니다. 신약 맨 처음의 사복음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선생님의 생애와 교훈을 기록한 것이요, 그 다음은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와 예수교를 심히 박해하다가 개종하여 예수의 열렬한 사도가 된 바울과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이 예수를 증거하며 전도한 경험을 기록한 사도행전입니다.  또 그 다음은 바울과 다른 사람들이 기록한 서신(書信)이며, 맨 나중은 그리스도 자신의 영감을 통하여 사도 요한에게 증거한 예언서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리하여"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장 1절)로 시작된 성경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요한계시록 22장 20절)는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구약과 신약과의 관계
위에 기록한 것과 같이 구약은 주로 이스라엘 민족에 관한 기록이요, 유대인이 존숭(尊崇)하는 경전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도교에서는, 신약 시대에는 구약이 이미 폐하여졌고 시대에 적합치 않으므로 별로 상고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누가복음 24장 4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의 모든 의식(儀式)과 제사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상징했고, 그 선지자들의 모든 예언은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가 그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열쇠 없이 구약을 풀지 못하고, 구약 없이 신약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바로 이해하려면 신약이나 구약을 차별 없이 연구해야 하고, 서로 대조 연구하는 가운데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누구의 말씀인가?


성경은 누구의 말씀인가?
위에서 모세 오경이나 선지자의 글이 하나님의 신의 지시와 영감을 통하여 기록되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의사로 기록된 것이 아니요,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문자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구약 성경을 가리켜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시편 118편 22, 23절)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책은 사람의 지식과 사상을 기록한 것이지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디모데후서 3장 16절)이라고 신약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베드로후서 1장 21절)고 하였습니다. 특히 요한계시록과 같은 책은 그 서두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1장 1절)고 밝힘으로써, 이것이 요한 자신의 저작이 아님을 나타냅니다.그뿐 아니라 성경 66권의 기자들은 자기들의 기록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수없이 표시하였는데,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주의 신이 내게 임하여” 등과 같은 말씀들이 구약 성경 가운데 3,800번 이상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권위있는 표현은 다른 경전에서는 볼 수 없는 일입니다. 만일 이것이 인위적으로 조작된 것이라면, 수천 년  계속해서 존숭(尊崇)을 받을 만큼 그 권위를 유지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이 기록된 목적
 성경이 기록된 목적성경은 무슨 목적으로, 누구를 위하여 기록되었을까요?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디모데후서 3장 15∼17절).“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한복음 5장 39절). 
  첫째 말씀은 사도 바울의 말씀이요, 나중 말씀은 예수의 말씀입니다. 이 두 성경 구절을 종합해 보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요, 예수 안에 영생이 있는데 우리 인간이 성경을 부지page14런히 연구함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게 되며 선을 행할 수 있는 완전한 인격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구주가 되시는 예수를 믿고 순종함으로 죄를 이기고 하늘 백성의 특권을 얻어 영생에 들어가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요한은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장 16절)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예수를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났으므로 우리는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밖에는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장 6절)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생명이신 예수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성경은 얼마나 가치있고 보배로운 책입니까?


성경의 불변성과 그 감화력
시대는 가고 세대는 바뀝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든 것이 변합니다. 오늘의 진리가 내일은 오류가 됩니다. 사람들의 지식이나 사상은 시대를 따라 무가치해집니다. 한때 인기 있던 서적도 얼마 안 가서 그 인기가 떨어집니다. 그러나 성경의 교훈과 진리는 영원히 빛납니다.
  사도 베드로는 말하기를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베드로전서 1장 24, 25절)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영화와 인간의 권세는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집니다. 애굽의 피라미드를 보십시오. 바벨론의 폐허를 보십시오. 로마의 콜로세움(원형극장·그리스도교인을 박해하던 곳)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을 박해하고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권력들은 저렇듯 처량한 유적들만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전세계에 퍼졌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들어가지 않은 나라는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위대한 감화력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프랑스의 무신론자 볼테르는 “성경은 내버린 책이다”라고 말했으며, 미국의 회의주의자 잉거쏠은 “이제 10년만 지나면 성경을 읽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라며 장담했지만, 프랑스 혁명 당시 그렇듯 학대받고 불살라버렸던 그 성경은 4년이 채 되기 전에 다시 해방되어 프랑스 사회의 무질서를 바로잡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또 영국 농촌의 피폐가 극도에 달하고 사회의 불안이 날로 극심해져 갈 때, 그것을 바로잡아 혁명 없이 사회 개조에 성공한 것은 존 웨슬레의 ‘메더디스트’(Methodist) 운동, 곧 성경 말씀을 가지고 방방곡곡으로 다니며 복음을 전파한 결과라는 것은 온 세상이 잘 아는 사실입니다.
  또한 아프리카나 태평양 섬 중의 식인종들이 사람 고기를 먹던 악습을 버리고 선량한 백성으로 변화된 것은 정치나 교육의 힘이 아니라 오직 종교의 감화였으며, 성경 말씀의 능력이었다는 것은 과연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베드로전서 1장 23절).“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브리서 4장 12절). 성경은 실로 생명력이 있는 말씀이요, 우리의 심령을 찔러 쪼개는 능력을 가진 말씀입니다. 사람이 성경 말씀의 감화를 입을 때 새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 말씀을 통하여 무한히 달고 아름다운 맛을 느끼게 됩니다. 옛날의 한 성경 연구자는 그 감상을 시로 노래하기를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시편 119편 103절)라고 하였습니다.
  성경 말씀은 읽으면 읽을수록,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더욱 흥미를 느끼게 되고, 그 깊고 오묘한 뜻을 깨달아 감격하게 됩니다.
  본 교과를 공부하는 여러분들도 각 교과를 공부하는 중에 그처럼 달고 오묘한 맛을 보시며 깊은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다음 과에서는 세계의 기원에 대하여 공부하겠습니다.
 



2010.12.27 15:38

제 3과 세계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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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 지혜로 세계를 지으셨고”(예레미야10장 12절).  
  세상은 어떻게 생겨났으며, 그 가운데 있는 동물과 식물들은 어떻게 생겨났으며, 또 사람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하는 문제는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의 관심거리요 흥미로운 문제가 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사람들의 호기심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올바른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지게 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기초가 됩니다. 
이 문제점에 관하여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대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그것을 연구해 보기로 합시다.
 
 
세 가지 주장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기 38장 4절). 

  첫째는, 토마스 헨리 헉스레이가 말한 불가지론(不可知論)입니다. 이것은 먼 옛날의 일을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찰스 다윈이 주장한 진화론(進化論)의 사상인데, 어떤 단순한 형태 혹은 혼돈 상태가 진화의 과정을 밟아서 오늘날과 같이 복잡한 세계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창조론(創趙論)성경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셨다고 믿는 사상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해결하려 함에는 난처한 점이 있습니다. 자연과학은 가상적 이론을 용납하지 않고 오직 실증만을 요구하는데, 이 세계가 생겨난 것을 어떻게 실증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 욥기에는 하나님께서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기 38장 4절)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생기기도 전에 있었던 일을 사람이 어떤 과학적 방법으로 실증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과학자가 실험실 안에서 시험관을 가지고 실험함으로써 증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결과에서 원인을 추리하는 귀납적 방법을 쓰거나 어떤 가정 아래 그것을 풀어 는 연역적 방법을 쓸 수밖에 없는데, 그런 추리나 풀이가 반드시 정확한 결론을 가져올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신빙성 없는 진화론 
  진화론적 사상은 옛날 헬라 시대에도 주장한 이가 있었으나 근대의 진화론은 지금으로부터 약 100 여 년 전에 영국의 찰스 다윈이 종(種)의 기원(起源)이라는 책을 저술함으로써 온 세상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 진화론은 순전히 가정(假定)을 기초로 한 것으로서, 자연도태(自然淘汰)와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원리, 즉 자연계에 있어서 그 생활 조건에 적응하는 생물은 생존하고, 그렇지 못한 생물은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는 이론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완성된 과학이 아니라 일종의 학설에 불과한 것입니다.
  일본 평범사(平凡社) 발행 대백과사전 진화론의 추세(趨勢)라는 항목에는 이러한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진화설은 생물학계에서 널리 또 확실히 신뢰하는바 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오늘날도 여러 가지 점에 회의적 태도를 가진 이들이 적지 않다. 특히 근래에 와서 이런 경향을 가진 사람들이 뒤를 이어 일어나고 있다. 그런 이들의 주장의 요점은, 요컨대 오늘날 진화론을 입증하는 데 사용한 자료가 오늘날에 제공하는 결론을 위해서는 너무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화론이 진리인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진화론에서는 물질 자체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는 설명하지 못하고, 다만 생물이 미생물에서부터 고등동물로 발전하여 마침내 사람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면 세계의 기원(起源)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은 상고할 필요조차 없고 진화론에서도 만족할만한 결론을 얻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세 번째 주장인 성경의 창조설을 검토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일 것입니다. 우리가 과학으로 찾을 수 없는 진리를 철학이나 종교로 찾는 것은 차라리 당연한 태도라 하겠습니다.
 

창조의 기록
  구약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 1장 1절에 기록하기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매우 단순하고 명료하고 확실성 있는 어조입니다. 또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편 33편 6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무슨 이론(異論)이 없습니다. 다만 사실을 사실로 인정했을 뿐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 어떻게, 얼마 동안에 이루어졌는지 상고해 봅시다.  
  창세기 1장 2절에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태초에는 이 지구가 많은 물로 둘러싸였고 흑암과 공허뿐인 혼돈한 세계였음이 짐작됩니다.
 

 첫째 날 
  그 첫째 날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세기 1장 4, 5절). 
  여기서 아침과 저녁이라고 말한 것은 지구의 자전(自轉)으로 인한 1주야(晝夜), 즉 24 시간을 뜻하는 것임을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성경 상 사실을 진화론과 부합시켜 보려는 노력에서, 창세기의 1일이 10만년 혹은 수백만 년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극히 모순된 의견이요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의 권능을 의심하는 태도입니다.
 

둘째 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창세기 1잘 7절).  
  즉 공기를 만들어 물을 지면(地面)과 공간(空間)에 나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공간에 증기층(蒸氣層)이 있어, 지구는 한대(寒帶)나 열대(熱帶)의 구별이 없이 기온이 균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증기층은 노아 홍수 때에 제거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오늘날 시베리아의 빙원에서 ‘맘모스’라는 열대산 코끼리의 동결된 시체가 부패되지 않은 채 매몰된 것이 고스란히 발굴된 것은 그 증거의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셋째 날
  땅의 물을 한 곳으로 모으고 육지가 드러나게 했으며, 그 육지에는 풀과 곡식과 나무들이 자라게 하셨습니다.
 

넷째 날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창세기 1장 15절) 하시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즉, 하늘의 천체, 해와 달과 별들이 이 날에 지구와 관계를 맺고 빛을 비추어 주었습니다.  
 

다섯째 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를 각각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여섯째 날
  육축과 곤충과 땅의 짐승들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이 모든 생물을 각 종류대로 창조하셨습니다. 만일 한 종류만 창조해도 여러 종류로 변할 수 있었다면 종류대로 창조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 유명한 멘델의 법칙에 의하면, 생물의 종류는 결단코 다른 종류로 변화될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즉 어떤 한도 이상 더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창조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세기 1장 26~28절). 
  이리하여 사람은 만물 가운데 가장 고귀한 존재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자로 창조함을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고상한 뜻을 자각할 때에 인생관이 달라지고 생애의 발걸음은 자연히 변화를 자져오게 됩니다.
 

창조 사업의 완성과 안식일
  하나님의 창조 사업은 6일 만에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세기 1장 31절). 이와 같이 6일 동안에 창조 사업이 다 이루어지매 하나님께서 제7일을 안식일로 구별하시고 이 날을 창조의 기념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 날을 지킬 때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업을 기억하고, 그분께 예배하고, 그분의 사랑을 감사함으로 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류가 태초로부터 이 귀한 안식일 제도를 계속하여 거룩하게 지켜왔었다면 오늘날의 세상과 같은 불가지론이나 진화론처럼 불신의 사상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창세기는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님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창세기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의 사실을 기록한 서사문(敍事文)이라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일자와 연대와 장소와 인명과 연령과 족보까지도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슨 글이든지 그 글 자체가 자체의 진실성 여부를 잘 드려내는 것입니다.
 

 조물주 이신 하나님의 존재
  과학 문명이 발달하고 물질주의가 횡행함에 따라 진화론이 성행하고 무신론적 사상이 널리 퍼졌습니다. 심지어 종교를 미신으로 돌리고 “신이란 것은 사람들이 가상적으로 만들어 낸 개념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특히 유물주의 사상은,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을 실재(實在)한 것으로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의 존재를 부인하지 못할 여려 가지 증거들이 많이 있습니다.  
 

양심이 스스로 증거함 
  첫째는, 인간의 양심이 스스로 신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더구나 우리 한민족(韓民族)은 옛날부터 하나님을 천지 만물의 지배자로 믿어 왔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본심이 전능하신 이를 신뢰해야만 만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분별해서 알만한 영적 능력을 스스로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은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로마서 1장 19절)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생애에는 비록 눈으로 볼 수는 없으나 마음으로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기이한 경험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경험들을 통하여 사람들은 누구나 신의 존재를 스스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만물을 봄으로
  둘째로는, 우리가 만물을 봄으로 조물주가 계신 것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원인 없는 결과는 없고, 모든 것은 그 만든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로버트 잉거쏠’이라는 미국의 한 불가지론자가 ‘헨리 와드’라는 유명한 설교자의 집을 찾아간 일이 있었습니다. 응접실에 들어가니, 거기에는 하늘 성좌(星座)들을 그려서 만든 훌륭한 천구의(天球儀)가 있었습니다. 그가 주인을 향해, “이것 참 훌륭한데요. 누가 만든 것입니까?” 하고 물으니, 주인은 서슴지 않고 “만들긴 누가 만들어요. 저절로 그렇게 되었지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물론 잉거쏠이 그 대답에 만족했을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스스로 한 대답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아름답고 기묘하며 너무도 질서 정연하고 조직적인 천연계를 볼 때 이것이 저절로 우연히 생겼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반드시 어떤 전능한 지혜가 만들어 낸 결과라고 보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고 타당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로마서 1장 20절).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이사야 40장 26절).
  과연 위의 두 성경 말씀과 같이 우리가 우주 만상을 볼 때 하나님의 신성과 그 무한하신 능력을 결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성경 말씀이 확증 됨
  구약 성경 맨 서두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장 1절)는 아주 확실하고 장중(莊重)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 한 마디가 방황하는 우리의 마음에 얼마나 확고한 기초를 놓아줍니까? 이 말씀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확립시켜 주는 말씀입니다.
 

참 하나님 
  우리는 세상의 허다한 신 가운데서 오직 참 신, 곧 참 하나님을 찾아 알고 그에게 경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떤 신이 참 신이요, 참 하나님일까요?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오 사시는 하나님이시오 영원한 왕이시라…그들에게 이르기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 하라 여호와께서 그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 명철로 하늘들을 펴셨으며”(예레미야 10장 10~12절).  
  과연 세상에 허다한 신이 있으나 이 세계와 만물을 짓지 아니한 신은 참 하나님이 아니요 우리가 존경하고 신뢰하고 경배할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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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장 16절). 

  인간은 창조될 때에 하나님의 특별하신 경륜을 따라, 동물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대로 아주 존엄성 있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성정(性情)을 능히 이해할 만큼 그 품성이 고상하고 지능이 뛰어났으며, 외모도 매우 건장하고 훌륭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간이 왜 타락하게 되었을까요? 또 이 세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할만큼 매우 아름답던 세상인데 어찌하여 이토록 눈물과 한숨과 질병과 사망이 가득한 처참한 세상이 되고 말았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죄의 시작
  죄는 어떻게 또 누구로 말미암아 시작되었고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을까요? 예수께서는 불의한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한복음 8장 44절)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요한일서 3장 8절)고 하였습니다.  
  그런즉 죄는 마귀로부터 시작되었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 자니, 거짓말하고 욕심 내고 남을 미워하는 자들은 다 마귀의 부하들입니다.  
오늘날 과학을 숭상하고 유물주의를 따르는 사람들은 대개가 무신론을 주장하고, 선신(善神)이건 악신(惡神)이건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며 또 악신, 즉 마귀와 사단의 존재도 인정합니다.  
  신약 성경 가운데는 마귀라는 말이 34회, 사단이라는 말이 37회, 합해서 71회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아울러 마귀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다윗왕은 시를 지어 이르되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편 53편 1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마귀는 어디서 왔는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누가복음 10장 18절)고 하셨으며,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는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列國)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이사야 14장 12~15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침의 아들 계명성'은 '루 스벨'이란 말의 번역으로, 천사의 이름입니다. 루스벨은 본래 하늘에 있던 가장 아름다운 천사로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고 천사들 중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만족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반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영광스러운 '루스벨'(아침의 아들 계명성)이란 이름 대신 '사단'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많은 부하들을 이끌고 이 세상으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계시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벰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요한계시록 12장 7~9절).  
  여기서 말한 '미가엘'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루스벨이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를 시기하고 교만한 마음으로 불평을 토하매, 하나님께서는 그를 타이르시고 그 불의의 마음을 버리고 회개하기를 오래 참으심으로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불평 불만이 자라 마침내 반역하였습니다. 평화로운 하늘 분위기에 불평의 씨를 더 용납할 수 없으므로, 미가엘은 정의의 검을 들어 루스벨과 그 부하들을 하늘에서 내쫓았습니다. 하늘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하나의 큰 의문이요 수수께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주간의 모든 존재들 곧 천사들이나 인간들이 다 자유 의지를 가지고 그에 따라 당신께 순종하고 당신의 뜻에 즐겨 따르기를 심히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진심으로 사랑하고 즐겨 순복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고 고귀한 것이니, 이것이 없이는 어떤 사회나 어떤 나라도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원칙은 자유와 사랑이요, 사단의 나라의 원칙은 억압과 궤휼인 것입니다.  
 

에덴동산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의 대상자를 위하여 한 아름다운 동산을 만드시고,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를 거기 두시고 저희로 그 곳을 지키며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행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부모가 살림난 자식의 집을 찾아가 그들의 행복한 생활을 살펴보고 잘 살기를 축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때때로 아담과 하와의 행복한 새 가정을 방문하사 저희를 도와주시고 저희의 행복을 더해 주시기를 심히 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저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품안에 영원히 거하도록 하기 위하여 저들과 한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창세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세기 2장 8~10, 15~17절).  
  하나님께서는 처음 부부의 행복을 위하여 에덴동산 전체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신 것은 그것을 아끼신 까닭이 아닙니다. 또 거기에 무슨 독이 있기 때문도 결코 아닙니다. 다만 당신과 사람 사이의 관계, 즉 하나님께서 만물의 창조주시요 소유주이심을 영원히 인식시켜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에덴동산의 소유권의 표로써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금단(禁斷)의 실과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에게 충성하는 표였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께 충성할 때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요 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인 것입니다. 이 금단의 열매야말로 인간을 하나님께 붙들어맨 사랑의 줄이었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마침내 불순종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하늘에서 이 세상으로 쫓겨온 사단의 속임수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 벰이 가장 간교하더라 벰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벰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벰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존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창세기 3장 1~6절).  
  여기서 벰은 요한계시록 12장에서 말하는 옛 벰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입니다. 그가 하늘에서 내쫓겨 이 세상에 와서 하나님의 경영을 방해하고 인류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사단은 아름다운 벰의 탈을 쓰고(저주받기 전에 벰은 매우 아름다운 짐승이었습니다.) 하와를 속여, 하나님을 불신하고 자기 말을 믿게 하였습니다. 세상을 속여 하나님을 의심하고 믿지 않게 하는 것은 사단의 상투적인 수단입니다. 오늘날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단의 속이는 말을 듣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서 떠나는지요!
 

불순종의 결과
  마땅히 존경해야 할 조물주, 곧 자기 자신을 지으신 창조주요 또 자기를 지극히 사랑함으로 에덴동산을 거처로 주신 하늘 아버지께 순종하지 않고 그에게 바칠 충성을 사단에게 바친 것은 실로 큰 반역이요, 범죄 행위입니다. 하나님과의 맹세를 저버린 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의 줄을 끊어버린 것입니다. 이에 인간에게는 저주가 이르고, 생명의 길이 막히게 되고, 불행과 고통과 비참함이 그 뒤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창세기에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세기 3장 16~19절).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세기 3장 24절).  
  불순종의 결과로 아담과 하와는 그 아름다운 에덴동산에서 살 특권과 생명나무와 실과를 먹을 특권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꽃이 시들고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볼 때 비로소 죽음이 만물의 운명인 것을 깨닫고 서글픔을 느꼈습니다. 그 후로 인간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질수록 더 타락하여 점점 더 마음은 사악해지고 몸은 쇠약해 갔습니다. 인간은 진화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퇴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단이 이 세상의 통치자가 되어 인류는 그 지배하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각처에서 시기와 투쟁과 처참함과 비극이 끊일 사이가 없고, 주림과 공포와 질병과 사망은 인간이 면치 못할 운명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거짓과 악독과 잔인성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근본 목적이 아니요 하나님이 차마 그대로 두실 수도 없는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죄악이 관영(貫盈)하고 비참함이 극도에 달한 이 세상을 깨끗이 없애시고 처음 목적하신 정의와 사랑의 세계를 다시 실현시키려 하신 것입니다.  
 

구원의 계획
  요즈음 각처에서 자동차 사고와 비행기 사고가 뒤를 이어 일어납니다. 그러나 허다한 사람들이 꿈에도 이런 사고를 생각하지 못하고 여행길에 오릅니다. 한치 앞도 볼 줄 모르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미래를 내다보시는 예지를 가지셨습니다.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죄의 참혹한 결과를 미리 내다보신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죄와 죄의 결과에서 구원하시고 건져내시기로 계획하셨습니다. 이것이 곧 성부(聖父)이신 하나님과 성자(聖子)이신 그리스도와의 사이에 이루어진 '평화의 의논'(스가랴 6장 13절)입니다. 인류가 범죄하고 타락하였을 때, 성자께서 몸소 세상에 탄생하사 인간의 형체를 입으시고 인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마땅히 죽어야 할 인류가 죄에서 구속되고 영원한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류가 범죄한 직후에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이 벰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창세기 3장 15절)고 선언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태어나 사단의 권세를 누르고 승리하실 것을 암시해 주셨습니다. 또한 양을 잡아 제사드리는 제도를 가르쳐 주심으로, 장차 구주께서 인류를 위하여 속죄 제물이 되실 것을 가르쳐 주시고, 그 의식을 행함으로 구주에 대한 믿음을 표시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침례 요한은 예수를 백성들에게 소개할 때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한복음 1장 29절)라고 말하였고, 사도 요한도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요한계시록 13장 8절)라고 말하였습니다. 즉 창세 이후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 속죄제의 희생인 흠 없는 어린양은 장차 오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의 모든 속죄 제물을 드린 자들도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표명했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구속의 경륜
  “사람의 타락은 온 하늘을 슬픔으로 가득 채웠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죄의 저주로 시들었고, 비참하게 죽을 운명에 처한 존재들이 살게 되었다. 율법을 범한 자들이 피할 길은 없는 것같이 보였다. 천사들은 찬양의 노래를 그쳤다. 하늘 궁정 전체가 죄가 가져온 황폐 때문에 통곡하고 있었다.  
  하늘의 영광스러운 사령관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타락한 인류를 불쌍히 여기셨다. 잃어버린 세계에 임할 화가 그분 앞에 떠오를 때에 그분의 마음은 무한한 동정심으로 감동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이 구속받을 수 있는 한 경륜을 입안하셨다. 깨어진 하나님의 율법은 죄인의 생명을 요구하였다. 온 우주에서 사람을 위하여 이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이는 한 분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 자신처럼 거룩하므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만이 범법을 속죄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밖에는 아무도 타락한 사람을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여 하늘과 조화시킬 수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책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매우 가증하므로 아버지의 아들을 틀림없이 분리시킬 죄의 수치를 자진해서 떠맡으실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비참의 심연(深淵)에까지 내려가실 것이었다”(부조와 선지자, 영문,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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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누가복음 2장 11절).
 
 
사랑의 종교
  그리스도교는 사랑의 종교이며,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 요한은 말하기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한일서 4장 8절)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성경 전체를 다 연구한다면 그 내용을 한마디로 줄여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아닌 일반 종교 특히 우상을 섬기는 자연 종교는 신(神)을 몹시 두렵고 엄한 존재로 인정합니다. 신을 소홀히 하거나 그 행위에 잘못이 있는 사람은 곧 엄한 저주를 받고 벌을 받게 된다고 믿습니다. 즉 우상 숭배자들 사이에는 복을 받기 위하여 신을 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와 그 신자들은 대개 이러한 경향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종교들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라고 가르치고 우주의 지배 원리가 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가장 밀접한 관계로써 표현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하늘과 땅처럼 먼 거리에 있는 것으로 표현하지 않고 지극히 사랑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나타냅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과 먼 거리에 있게 되었으나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을 하나님과 결합시키고 아버지와 아들과의 밀접한 관계로 회복시켜 주신다고 가르칩니다. 요한은 이 고상하고 오묘한 뜻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였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요한일서 3장 1, 2절).  
  이 말씀 가운데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에 대한 감격과, 세상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이해하지 못함에 대한 애석함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이 나타나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자들을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시고 그에게 참된 행복을 주시기 위하여 그 앞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세상이 아무리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를 믿지 않을지라도 저희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큰 특권으로 알고 스스로 만족함과 기쁨을 느낍니다.  
 

지극한 사랑 
  하나님께서 잃어버렸던 우리, 죽고 멸하여질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시기 위하여, 영원 전부터 같이 계셨던 당신의 외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사 우리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게 한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그 큰 희생과 지극한 사랑에 대하여 무한한 감격을 느끼게 됩니다. 요한은 이 사실을 기록하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장 16절)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불순종함으로 멸망할 자를 구원하여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사랑하는 아들 독생자를 죽음에 내어주신 그 놀라운 사랑, 그것은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일을 실제로 성취하신 이가 바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공의를 위한 사랑
  그렇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지 않을 수는 없었을까요? 대저 공의는 사사로운 정에 매이지 아니하고 원칙을 따르는 것입니다. 한번 맺은 언약, 한번 세운 법은 다시 고치지 않는 것이 공의입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세기 2장 17절)고 한 원칙을 어겼으니 인간은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불순종의 씨를 가지고 영원히 산다는 것은 불행을 영원히 지속시키는 것입니다. 죄의 근성은 그 후손들에게도 유전되어 그들도 역시 죄를 범하고, 죄인 아닌 자는 한 사람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온 세상은 오늘날 보는 바와 같이 죄악으로 가득 차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온 인류는 멸망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만드신 인류, 영원히 행복을 누리며 사랑의 대상자가 되어 주기를 기대했던 그 인류가 멸망하는 것을 그대로 두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죄값을 대신 갚고 인류의 죄의 근성을 근본적으로 고쳐주셔서 인류로 하여금 영원히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곧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우리 인류의 심령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을 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공의를 살리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나타내신 오묘한 진리입니다.
 

유일한 방법
  인류를 구원하는 데는 오직 이 길밖에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쓰라린 경험을 맛보신 것입니다. 어찌하여 이 길밖에 없었을까요? 사람으로서는 사람의 죄를 대신 질자가 없습니다. 이는 죄인 아닌 자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한 사람으로서 전 인류의 죄를 담당할 자도 없습니다. 이는 전 인류의 가치와 대등한 가치를 지닌 자가 인류 중에는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공자나 석가모니나 모하메드나 소크라테스와 같이 위대한 성인일지라도, 그들 역시 인류의 조상 아담의 후예로서, 모태로부터 죄의 유전과 품성을 받아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아무리 선(善)을 행하였다 할지라도 그 조상으로부터 유전된 죄의 운명을 면치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은 보통 인간과 다르십니다. 그분은 신성(神性)으로서 인성(人性)을 쓰신 것입니다. 곧 그는 하나님의 성자(聖者)로서 이 세상에 탄생하셨습니다. 그는 곧 하나님과 함께 만물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손으로 우리 인간이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 밖에는 우리 인간의 잘못된 심성을 바로잡아 줄 이가 없으며, 그분 이외에는 우리 죄를 대속해 줄 이가 없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장 6~8절).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로마서 1장 15~17절). 
  그런 까닭에, 사도 베드로는 예루살렘의 수천 명의 대중 앞에서 큰소리로 담대히 이렇게 외쳤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사도행전 4장 12절).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우리를 죄와 죄의 결과에서 건져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버린바 된 인류를 위하여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인성을 쓰고 세상에 오시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공부해 봅시다.  
 

처녀 마리아의 잉태
  아시아의 맨 서쪽 지중해 연안에 팔레스틴이란 지방이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에 이 지방에 유대 나라가 있었고, 그 나라의 북쪽 갈릴리 지방에 나사렛이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 ‘요셉’이라는 목수가 살았는데, 그는 같은 마을에 사는 ‘마리아’라는 처녀와 약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요셉에게 이상한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이 사연이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마리아가 요셉과 청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태복음 1장 18~20절).
  여기에 자세한 말이 기록되지는 않았으나, 천사는 몰론 요셉이 이해할 만큼 마리아의 잉태한 바는 하나님이 일찍이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 곧 이스라엘 민족이 오랫동안 바라던 메시야임을 분명히 인식시켰을 것이요, 또는 이사야가 이미 7백 년 전에 예언한 바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야 7장 14절)는 말씀을 상기시켜 그로 의심을 버리게 하고 메시야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했을 것입니다(‘메시야’는 히브리어로, 헬라어의 ‘그리스도’와 같은 말입니다. 즉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란 뜻이며, 유대인들이 흔히 구주라는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임마누엘’이란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천사가 계속하여 요셉에게 이르되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태복음 1장 21절)고 하였습니다(예수라는 말의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에 요셉은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마리아 데려오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처녀 마리아에게는 천사가 나타나 이러한 기별을 전하였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누가복음 1장 28, 31절).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누가복음 1장 34, 35절).  
  마리아도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두려워했으나 천사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이스라엘 온 민족이 바라고 기다리던 메시야가 자기 몸에서 나시겠다는 귀한 허락을 믿게 되어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누가복음 1장 38절) 하고 공손히 그 신앙을 표명하였습니다. 현대의 과학으로는, 남자를 모르는 처녀가 잉태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요 이해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 가운데는 이러한 초과학적 기적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실에 있어서도 해명할 수 없는 기괴한 일들이 허다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명할 수 없는 일은 모두 부인해야만 할까요? 부인한다고 그것이 사실을 바로 판단하는 것이 될까요?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무엇이나 “능치 못하심이 없으시다”. (누가복음 1장 37절). 우리는 차라리 다윗과 같이 “이 지식이 네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편 139편 6절)라고 겸손히 고백함이 현명한 태도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유대 나라 베들레헴에서 호적 조사가 한참 진행되고 있던 때였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에 사는 젊은 부부 요셉과 마리아는 새로 호적을 하기 위하여 본적지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손님이 너무 많이 모여들어서 여관은 말할 것도 없고 온 집과 마을이 모두 사람으로 차고 넘쳤습니다. 이 젊은 부부는 머무를 곳을 얻지 못하여 어떤 집 외양간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 밤에 마리아는 산기가 있어 아기 예수를 낳고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습니다. 그 때에 베들레헴 성 밖 언덕에는 양떼를 지키며 밤을 보내는 목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세상의 어지러움을 탄식하며, 어서 메시야가 오셔서 세상을 바로잡아 주시기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한 천사가 타나나 그 빛난 광채가 두루 비치니 저들이 심히 두려워하였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누가복음 2장 10~12절)고 하였습니다.  
  이런 기별과 함께 천사들은 넓은 들과 산골짜기를 통하여 멀리 퍼진 이 찬미 소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이르는 축복과 평화를 노래한 것입니다. 과연 예수를 받아들이는 자들의 마음 가운데는 평안과 화평이 있습니다. 그들의 가정이나 사회에도 평화가 깃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다툼이 자취를 감추고 오직 화평만 있게 될 것이니, 예수님이야말로 ‘평화의 왕’이십니다.
 목자들은 천사의 지시대로 베들레헴 성으로 돌아가, 강보에 싸서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를 찾아보고 그에게 공손히 절하였습니다.  
또 먼 동방 나라에서는 박사들이 이상한 별을 보고 구주가 나실 것을 알고 유대 나라 베들레헴으로 찾아와, 구주로 나신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황금과 유황과 몰약 등 매우 값진 예물을 드리고 갔습니다. 그들은 옛글 가운데서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민수기 24장 17절)라는 말씀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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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누가복음 19장 10절).  
 

때가 차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라디아서 4장 4절).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하신 때가 이르매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로 더불어 세상을 창조하실 계획을 세우실 때부터의 경륜이었습니다. 인류가 타락하게 되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범죄한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한 것이니, 이것이 곧 ‘평화의 의논’입니다. 그리하여 예정된 때가 이르자 예수께서는 경륜대로 전 세계의 중심지가 되는 유대 나라의 베들레헴에서한 아기로 탄생하시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선지자 미가가 예언한 것인데, 이르기를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가서 5장 2절)고 하였고, 공생애 시작에 관해서는 다니엘의 예언서(다니엘서 9장 25~27절 참고) 가운데 그 연대까지 분명히 예언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온 인류의 구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정하신 그 시간에, 예정하신 그 장소에서
가장 비천한 환경 가운데 탄생하시고, 전혀 생각지 않았던 목자들과 먼 동방에서 온 박사들의 경배
와 축하를 받으셨습니다.
 

 어렸을 때
  그 후 박사들은 고국으로 돌아갔고, 요셉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나사렛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애굽으로 피난하였습니다. 이는 당시에 왕으로 있던 헤롯이 자기의 왕위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유대인의 왕으로 나셨다는 아기를 죽이려 했기 때문입니다. 아기를 해하려던 헤롯왕이 죽은 후에야 그들은 나사렛으로 돌아왔습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누가복음 2장 40, 52절).  
  이 말씀은 누가가 기록한 예수의 어렸을 때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매우 간단한 말씀이지만,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충실히 자라고 있음을 잘 나타냅니다. 어린 예수는 그 지혜와 기능이 뛰어나게 자랐으며, 그 품성이 아주 부드럽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과 육체의 능력 또한 균일하고 자연스럽게 잘 발달하였습니다. 그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봉사하기를 좋아하였으며, 굽히지 않는 인내력과 변함없는 성실성을 가졌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의 자라남을 주목하였으며, 그를 하나님의 뜻대로 양육하기 위하여 하늘로부터의 지혜를 얻기를 간절히 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린 예수를 무릎에 앉히고 성경 말씀을 가르쳐 주기를 힘썼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당시 랍비(유대인의 선생)들의 학교에서는 배우지 아니하였을지라도 성경 말씀을 잘 알았고, 또한 천연계의 모든 사물을 주목하여 살피는 가운데 하늘의 지혜를 얻었습니다.  
  예수는 열두 살 되던 해 유월절에 그 부모와 같이 예루살렘에 올라갔는데, 일행이 돌아올 때에 그는 예루살렘에 올라갔는데, 일행이 돌아올 때에 그는 예루살렘에 머물러 랍비들과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누가복음 2장 46~47절).  
   열두 살 난 예수의 슬기로운 질문과 그의 놀라운 대답은 당시에 지식을 자랑하던 랍비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어른이 되기까지
  그는 삼십 세가 되기까지 가난한 목수 요셉의 집에서 그의 아들로 자라나 장성한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그는 인간의 온갖 고통과 쓰라림을 맛보면서 요셉의 목수 일을 신실히 도왔습니다. 그는 날마다 수고스러운 노동을 하였으나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충성스럽게 그 책임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그는 같이 모여서 쓸데없는 장난이나 한담을 할 만한 시간의 여유를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나사렛이라는 동네는 몹시 악한 동네였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반문할 만큼 악한 습관이 가득한 고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곳에 사시면서도 그 악한 습관에 물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순결을 보전하시기 위하여 매우 경계하고 주의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는 사랑과 동정심이 많으셔서, 고난당하는 자를 보면 도와주고, 멸시당하는 자를 보면 위로하고, 연약한 부녀자들과 아이들을 친절히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르기를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브리서 4장 15절)고 하였습니다. 그는 우리를 변호하시고 우리를 대속하시고 우리의 모범이 되시기 위하여 우리와 똑같은 처지에서도 죄 없는 생활을 하셨습니다.
 

 침례받고 공생애에 
  유대인들은 삼십 세가 되어야 공직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삼십 세가 되어서야 공생애에 나아가기 위하여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러 요한에게 나아가실 때에, 요한은 그에게서 기이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범할 수 없는 위엄과 깨끗하고 고상한 기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오직 예수만은 신성한 분위기를 발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그가 이스라엘이 바라는 메시야가 아닌가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요한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시니 개인적으로 볼 때 침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침례는 회개한 자가 그 죄를 물에 장사해 없애는 것을 상징하는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본을 보이기 위함이었으므로, 침례 받는 것을 좋게 여기셨습니다. 그는 요단강으로 내려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셨는데, 온몸을 물에 잠그는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성령께서 비둘기같이 내려 그에게 임하셨으며, 또 하늘에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태복음 3장 17절)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에 요한은, 예수께서 틀림없이 메시야이신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무리들에게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한복음 1장 36절)라고 말하였습니다.
 

시험을 당하심
  침례를 받으신 후, 예수께서는 장차 행하실 당신의 사업을 구상하시며 능력을 얻기 위하여 조용한광야로 나아가셨습니다. 거기서 그는 40 일간을 금식 기도하시며 마음의 준비를 하셨습니다. 일찍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범죄 하게 한 사단은 이때야말로 예수를 유혹할 만한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단은 제일 먼저 식욕을 이용하여 예수를 시험하였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태복음 4장 3절)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능력을 먼저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사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곧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태복음 4장 4절)는 구약 성경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으로 이에 답변하셨습니다. 이에 사단은 성경 말씀을 이용하여 예수의 자만심을 일으켜 보려고 하였습니다. 사단은 그를 높은 곳에 세우고 뛰어내리라 하면서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마태복음 4장 6절)고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마태복음 4장 7절)고 하시고 성경 말씀으로써 그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다음에 사단은 예수를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태복음 4장 9절)고 하였습니다.  이 말에서 사단의 정체를 알게 되신 예수께서는 곧 물리쳐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태복음 4장 10절)고 하셨습니다. 이같이 사단은 사람을 시험하되, 먼저는 먹는 문제, 다음은 교만심을 길러주는 명예, 그 다음은 세속적 번영과 권력, 이 세 가지로써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려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험을 이기게 하는 것은 오직 성경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마음속 깊이 간직해 두는 것은 시험과 유혹을 이기고 이 세상을 안전하게 살아가는 훌륭한 방법이 됩니다.
 

봉사와 전도 사업
  예수께서는 침례를 받으시고 시험을 이기신 후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가서 거기서부터 전도를 시작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이르자 그는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서 당신의 사명에 관하여 예언한 이사야의 글을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복음 4장 18, 19절 ;이사야서 61장 1, 2절 참고).
  예수께서는 읽기를 마치시고 앉으시며 이르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누가복음 4장 21절)고 하셨습니다. 이는 곧 이사야의 예언이 자기에게서 성취됨을 확증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태복음 9장 35절).  
 예수께서는 각 회당에서 생명의 말씀을 가르치시며 모든 병자와 쇠약한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가난한 자의 동정자가 되시고, 죄인의 친구가 되시며, 과부와 고아들의 보호자도 되시고, 어린이들을 사랑하는 축복자도 되셨습니다. 모든 어려운 처지에 빠진 자들이 그에게서 해결책을 구하고, 모든 마음을 상하고 번민하는 자들이 그에게서 마음의 위안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참으로 훌륭한 의사이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지혜가 이해하지 못할 허다한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소경이 보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벙어리가 말하고 문둥이가 깨끗하여지며, 사악한 귀신 들린 자가 나으며, 죽은 자까지도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바람을 꾸짖어 파도를 진정시키고, 떡 다섯 덩이와 생선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시고, 바다 위를 육지같이 걸어가시고,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시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말씀으로 말라 죽게도 하셨습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그가 하셨으며, 이는 곧 그분의 신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탄생에서 인성과 신성의 결합을 보았지만, 또한 그의 생애에서 단순한 인성이 아니요 신성을 갖추신 그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만물을 만드신 이시며 창조의 능력이 그분 안에 있습니다. 그가 인성을 쓰셨으나 오히려 신성을 가지셨고, 하늘과 땅 사이에 다리가 되셨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해시키는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장 6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사명과 십자가
  예수께서는 신성으로 인성을 쓰신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항상 자신을 가리켜 인자(人子) 곧 사람의 아들이라 부르기를 좋아하셨습니다. 그가 당신의 사명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누가복음 19장 10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태복음 20장 28절)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했을 때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말하기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태복음 1장 21절)고 하였습니다. 예수의 사명은 잃어버린 자를 찾는 것이요 목숨을 바쳐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여 저희를 그 죄에서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르시되 “모세가 광야에서 벰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장 14~15절)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벰을 든다는 것은 당신이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의미한 말씀인데, 옛적에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에 있을 때 불순종함으로 저주를 받아 온 무리가 불벰에게 물려 죽은 자가 많았습니다. 그 때에 모세가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불벰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민수기 21장 8절)고 하였습니다. 모세가 놋벰을 만들어 장대 위에 두었을 때 그것을 쳐다본 자는 모두 살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지실 십자가를 상징했던 옛 일을 상기시키시면서, 당신이 실제로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예고하는 동시에 당신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고 구원을 얻으라는 호소를 하신 것입니다. 과연 이 십자가야말로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께서 인류를 사랑하신 지극한 희생의 기념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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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7 15:42

제 7과 믿음과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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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사도행전 16장 31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린도후서 6장 2절).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이란 재난이나 질고나 곤궁이나 기타 어려운 환경 가운데 빠져 있는 사람을 도와서 그 어려운 환경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어떤 아이가 우물에 빠져 죽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것을 보고 있던 한 용감하고 의협심 있는 사람이 그 아이가 죽게 된 것을 차마 버려 둘 수 없어 몸소 그 우물 속에 들어가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 아이를 건져내서 살게 하였으면 그 아이는 구원함을 얻은 것이며, 그 의협심 있는 사람은 그 아이를 구원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사업에 대한 좋은 비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단순히 육신적인 어떤 위험에서 건져내는 것 이상의 좀 더 깊고 넓은 의미가 있습니다. 지난 과에서도 연구하였지만,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에 천사는 요셉에게 말하기를“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태복음 1장 21절)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을 죄에서 건져내는 것이 예수의 사명이요 그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말 자체가 ‘여호와는 구원이시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행하신 사업은 인류를 그 죄에서 해방시키심으로 모든 불행에서 구원해 내시는 것입니다.
 

죄에서의 구원 
  사람을 죄에서 구원한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죄 즉 죄의 근성, 죄의 습관, 죄의 생활에서 건져내는 것, 둘째는, 죄의 결과로 오는 비참한 운명에서 인간을 건져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인간들은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오는 온갖 불행한 것-불안, 공포, 번민, 실망, 고통, 질병, 전쟁, 사망-을 저주하고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애쓰나 그것의 원인이 되는 죄에 대해서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원인을 제거하지 않고는 그 결과를 없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의 결과인 불행과 비참에서 건짐을 받으려면 먼저 죄의 근성, 죄의습관, 죄의 생활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이 죄 중에서 살고 있다는 인식, 곧 ‘나는 죄인이다’라는 인식이 필요하며, 또 죄에서 벗어나려는 의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의욕이 있다 할지라도 인간이 그 의욕만으로 죄의 근성, 죄의 습관, 죄의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하늘로부터 기이한 감동을 받아 회개함과 중생의 새 경험을 얻어야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결심합니다. “나는 나의 못된 악습을 완전히 끊어버리려고 한다.” 가령 성을 잘 내는 성향이나, 술이나 담배나 마약류를 복용하는 습관, 혹은 도박과 방탕한 생활을 즐기는 등의 여러 가지 악습을 끊어버리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러나 그 결심은 마치 썩은 세끼와 같아서 오래 가지 못하고 끊어져 버리고 맙니다. 속담에 “지어먹은 마음이 사흘을 못 간다”는 말과 같이 됩니다. 죄의 습관에 물든 사람들의 마음은 그 자제력이 몹시 약해져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 결심을 실천할 능력이 없습니다. 죄의 종이 된 자는 하늘로부터 능력을 받기 전에는 스스로 죄를 벗어버리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도 자기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악의 근성을 억제하지 못하여 절망 중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장 24절)고 탄식하였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죄의 근성을 제거해 보려는 사람은 누구나 사도 바울과 같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타고난 죄의 근성이 그로 하여금 선을 행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또 말하기를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로마서 7장 14, 19, 20절)고 하였습니다.  
자기 속에 있는 죄의 근성이 자기를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므로 자기는 결국 죄로 죽을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실망한 것입니다.
 

죄의 결과에서 온 운명
  헬라, 즉 오늘날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 박물관에 가보면 매우 기괴한 화석 하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옛날 헬라 사람들이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의 등에 죽은 자의 시체를 지우고 쇠사슬로 결박하여, 그 시체의 독이 그 죄수의 몸에 스며들어 죽을 때까지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다가 죽게 하고, 죽은 다음에는 그 시체를 그냥 한 곳에 장사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화석이 되어 오늘날 아테네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사도 바울은 이러한 참혹한 형벌을 상상하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고 탄식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우리 인간의 운명이 마치 사형수와 같이 멸망하고 말 것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과연 인간은 모태로부터 아담의 불순종의 결과로 말미암은 악한 성질을 유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경향을 타고났으므로, 죄를 범하지 않고 죄와 관련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바울은 이르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로마서 3장 10, 12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은 죄의 결과인 그 삯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에서의 고통과 현실에서의 사망뿐 아니라 장차 있을 둘째 사망, 곧 영원한 멸망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인인 인간은 아무 희망도 없이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망당하고 말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누구나 이러한 자신의 절망 상태를 자각할 때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사도행전 16장 30절)라고 부르짖게 됩니다.  
  이 말은 옛날 빌립보 성에 있는 감옥의 간수가 스스로 자결하려다가 바울의 만류함을 듣고 그를 향하여 호소한 말이지만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도 역시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까 하고 스스로 반문해 볼만한 말입니다. 이에 대하여 무슨 훌륭한 답이 없을까요? 바울은 그 간수에게 명확히 대답하기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사도행전 16장 31절)고 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 이것이 곧 절망 중에 있는 우리 인간이 구원을 얻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 외에는 우리를 죄에서 건져줄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죄의 유전으로 인한 죄의 근성 때문에 선을 행할 수 없으나, 예수께서는 신성으로서 인성을 쓰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이 당하는 갖은 시련과 유혹과 고통을 당하였을지라도 그것들을 능히 극복하고 홀로 죄 없는 생활을 사셔서 의를 이루셨으며, 죄가 없으시니 우리 죄를 대신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죄를 이길 힘과 능력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이르기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사도행전 4장 12절)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단정한 말입니다. 바울은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로마서 4장 25절)고 하였습니다.  
  즉 의로우신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불의한 우리를 죄 없는 것처럼 의롭다 하심을 입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죄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이르기를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로마서 5장 10절)고 하였습니다.  
  이는 우리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나 그와 원수가 되었으나 예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또 예수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새 사람으로 재창조되어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않고 의의 종으로서 의의 생애를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죄에서의 구원이니, 바울이 말하기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에베소서 2장 8절)고 하였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의를 행한다든지 믿는다는 것이 의욕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요 그 의욕을 밀어주는 어떤 힘이 작용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서 죄에 대한 심각한 자각과 믿어야 하겠다는 간절한 욕구가 솟아나지 않으면, 또는 어떤 자극과 깨달음을 주는 동기가 없으면 결코 믿거나 의를 행할 수 없습니다. 비록 자극과 감동을 받아들이거나 저버리는 선택권이 자기에게 있기는 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믿는다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도 은혜로 말미암는 일종의 선물인 것입니다.
 

믿음은 무엇인가?
  그러면 우리를 죄와 죄의 결과에서 구원하는 믿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신약 성경 히브리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1장 1절)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믿음이란 희망하는 일에 대하여 이미 현실로 있는 것처럼 확신을 갖는 것이요, 또 보지 못한 일을 본 것처럼 확인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그렇게 확신하며 확인할 수 있습니까?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브리서 11장 6절).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해야 할 것이며, 그가 당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버리지 않고 돌보시고 보상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신뢰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고 그가 우리 죄를 대속해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그를 우리의 구주로받아들이고, 이 일에 대하여 확신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란 단순히 사실에 대한 확신뿐이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부모가 자기에게 좋은 것을 공급해 줄 것을 알기 때문에 부모에게 전적으로 매달리는 것처럼 그렇게 매달리는 태도입니다. 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로마서 10장 17절)는 성경 구절도 있지만 우리는 들음으로 말미암아 성경 진리를 이해하고, 영적 감동으로 말미암아 들은 바 진리를 확신하게 되어 믿음이 더욱 발전되고 튼튼한 기초 위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 1장 12절)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가 곧 믿는 자인데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위와 영적 능력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믿음 안에서 사는 생활
  요한계시록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장 20절).  
  예수께서는 언제나 우리들 마음문 밖에 서서 우리가 문을 열기만 고대하고 계십니다. 그러다가 문을 열면, 곧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먹고 즐기며 같이 사십니다.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언제나 강조하시기를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복음 15장 4, 5절)고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이란 확신의 생활이며 또한 신뢰의 생활이요, 좀 더 철저하게는 예수와 연합된 생활입니다. 그 안에서 그를 힘입어 살 때, 우리의 무력함은 강력함이 되고, 우리의 불가능은 가능이 됩니다. 나의 악은 없어지고 그리스도의 선이 나를 지배합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장 20절)고 하였습니다. 또 이 믿음 안에서의 생활의 능력에 대하여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장 13절)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능력이 믿는 자의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음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2010.12.27 15:42

제 8과 회개와 거듭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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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누가복음 5장 32절).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사도행전 3장 19절).
 

회개란 무엇인가?
  회개란 쉽게 말해서 과거의 잘못된 생활을 뉘우쳐 고치고 그 방향을 돌이켜 새롭고 바른 길을 택하여 걷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이 회개는 신앙생활에 들어오는 맨 첫 계단입니다. 그러므로 옛날의 선지자들도 백성들에게 회개를 부르짖었고, 침례 요한도 회개의 기별을 전했으며, 예수께서도 그 전도의 첫마디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태복음 4장 17절)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을 전도 사업에 내보내실 때에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라고 전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이는 천국을 받아들이고 얻는 길이 회개에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은 곧 네가 죄인임을 알고 그 길에서 돌아서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그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이사야서 58장 1절)고 부르짖었습니다. 우리가 선한 사람이 되고 바르고 옳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자신의 허물과 죄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하면 고치고 바로잡으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이나 부족을 알려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잘난 줄 알고, 스스로 잘 아는 줄 알고, 자기에게는 결점이 없는 줄 압니다. 그리하여 죄인이라든지 회개라는 말을 들으면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첨하는 말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좋은 약이 입에는 쓰나 병 고치는 데는 이롭고, 충성스러운 말이 귀에는 거슬리나 행함에는 이롭다”는 격언이 있듯이, 우리의 결함을 지적해 주는 것처럼 우리의 생애를 이롭게 해주는 것은 다시없습니다.
 

우리가 어찌 할꼬?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지 3일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후에 승천하셨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와 작별한 후에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서 모여, 예수의 분부대로 성령께서 능력 부어주시기를 기대하며 10 일간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통회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성심으로 기도한 결과, 거기 모였던 120명의 교인들은 모두 성령의 능력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 베드로는 예수의 수제자였지만 예수께서 잡혀가실 때에는 재판장에 따라갔다가 세 번씩이나 예수를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회개하고 기도함으로 성령의 능력을 받은 후에는 예루살렘성의 많은 군중 앞에서 큰 소리로 외쳐 예수를 증거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사도행전 2장 36절, 3장 14, 15절). 이 말을 들은 모든 자들이 마음에 찔려 부르짖기를“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사도행전 2:37절) 하였습니다.  
  죄를 지적하여 경고하는 일은 그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사도행전 2장 38절)고 하였습니다. 그 날 오후에 베드로는 성전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여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사도행전 3장 19절)라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유쾌하게 되는 날이라 함은 곧 죄의 속박에서 완전히 건짐을 받을 구원의 날을 가리키는데, 영원한 구원에 참여할 조건은 믿는 것과 회개입니다.  
 

 회개와 거듭남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회개는 단순한 뉘우침이나 죄에 대한 인식, 또는 약간의개선이 아닙니다. 그것은 완전한 방향 전환입니다. 지금까지의 생활 상태와는 완전히 다든 생활 상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듭남 즉 ‘중생’이라는 말로도 표현됩니다. 회개와 중생은 동일한 경험의 양면으로, 다만 관점이 다를 뿐입니다. 회개는 사람 편에서 되는 것이요, 거듭남은 하나님 편에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한번은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8장 3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성한 사람에게 어린아이가 되라는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예레미야 13장 23절).  
  사람이 자신의 노력이나 힘으로 회개한다고 해서 과연 얼마나 개선될 수 있을까요? 앞에 과에서도 말했지만, 자신의 결심이나 맹세는 그렇게 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편에서의 회개만으로는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변화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육이나 수양의 힘을 과신하여 그것이 사람을 개과천선(改過遷善)시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악한 사람을 선한 사람이 되게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 품성을 완전히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학식 있고 도덕적 수양이 있는 사람도 그 마음을 바로잡는 데는 무력함을 고백하고 탄식하였습니다.
 

거듭남의 경험
  그러나 오직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거듭남의 경험입니다. 한번은 예수께서 니고데모라는 유대인 지도자의 방문을 받으신 일이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는 학식 있고 문벌 좋은 훌륭한 인물로, 당시 산헤드린 의회 의원이었는데, 밤에 예수께 찾아와서 가르침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무력함을 바울과 같이 심각하게 느껴보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한복음 3장 5~8).  
  이 말씀에 의하면, 참된 회개는 곧 거듭나는 것, 곧 어린아이가 어머니 배에서 새로 나는 것처럼 새 사람이 되어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거듭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능력 이상의 능력으로써 사람을 도우셔 새로남을 얻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바울은 이 경험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디도서 3장 3~5절)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새로 나는 경험은 성령의 힘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의인이 올바른 생애를 살려면 거듭남의 경험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미암는 새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회개한다는 말 가운데는 두 가지 뚜렷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믿기 전에 지은 모든 죄의 용서하심을 받는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력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경험이 없으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경험은 제삼자가 볼 수 있거나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바람이 부는 것처럼 그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영적 변화입니다.  
 

새로남의 계단
  우리가 이 경험을 얻기 위해서는 몇 계단을 밟아야 합니다.  
  첫째, 죄를 아는 것. 영국의 유명한 재상 ‘그랏더스턴’은 “근대 생활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그것은 곧 죄를 아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죄를 아는 것, 이것은 개인 생활에서나 사회생활에서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날마다 죄를 물마시듯 하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 깨닫지 못합니다. 죄를 점하고 죄 가운데 살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 모르는 것처럼 딱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모태로부터 죄의 근성을 가지고 나왔고 또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으므로 죄인 아닌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부모를 모르는 자식이 있다면 그 자체가 벌써 죄인 것처럼, 인생을 내시고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한 죄가 없는 것입니다. 다음은 불법이 죄입니다. 하나님을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고 순종하지 않음이 죄인 것입니다. 또 그 다음은, 마음에라도 불의한 생각을 품는 것이 죄요,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행치 않으면 그것 역시 죄가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죄와 상관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둘째, 뉘우치는 것. 자기가 죄인인 줄을 알고 스스로 잘못되었음을 알면 충심으로 뉘우쳐야 하고, 죄 지었음을 슬피 통회해야 합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신자들에게 편지하기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린도후서 7장 9, 10절)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근심이란 마음에 슬퍼하고 통회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새로운 생애를 하기 위한 전환점을 이루는 통회입니다. 이것은 유감되다든지 섭섭하다는 정도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 고통스러운 장면을 생각할 때, 이것이 모두 나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낄 때, 참을 수 없이 일어나는 마음의 감동과 아울러 죄를 미워하고 죄를 원수처럼 가증하게 여기게 되는 감정입니다. 이러한 뉘우침과 통회가 우리의 경험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셨다”(로마서 2장 4절)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적 감동이 아니고는 아무도 이러한 경험을 맛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섭리인 것입니다.  
  셋째, 죄의 고백. 죄에 대한 절실한 생각과 통회로 마음에 아픔을 느낄 때, 위안과 평안함을 얻는 방법은 곧 죄의 고백입니다. 요한은 그의 편지서에서 이르기를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장 9절)라고 하였습니다. 죄의 사하심을 받는 방법은 극히 간단합니다. 죄를 인정하고, 죄를 통절히 미워하고, 또 그 지은 죄를 숨김없이 자백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사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죄를 고백하는 자는 그 마음의 고민이 평안이 되고, 슬픔은 기쁨으로 변합니다. 그런데 죄를 고백할 때에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결코 지혜스럽지 못하게 죄를 고백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자기만 아는 하나님께 대한 죄는 오직 하나님께만 고백하고 그의 사유하심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피해를 입힌 상대자가 있는 경우에는 그 상대자에게 정중하게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할 것이요, 만일 물질적 손해를 입혔으면 배상해야 합니다. 만일 배상할 능력이 없을 때에는, 자기의 처지를 이야기하고 가능한 한 성의를 표시해서 어떠한 타협을 지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공중(公衆) 앞에 죄를 범했으면 마땅히 공중 앞에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제삼자나 공중 앞에서 폭로하는 일은 결코 아름다운 일이 아니며, 성경의 원칙도 아닙니다.   
  넷째, 죄에서 떠남. 맨 마지막 조건은 죄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대로, 돌이키는 것이요,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사도행전 26장 29절)는 것입니다. 즉 지금까지의 온갖 죄악적 환락의 길에서 돌이켜서 정반대의 길, 곧 새 생애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죄 사함의 표상과 거듭남의 표상으로써 침례를 받고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여 그리스인으로서 새 생활을 하게 됩니다.   
 

승리의 생활
  그러면 한번 회개의 경험을 가진 사람은 죄에 대하여 안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사단은 회개한 사람일수록 더욱 유혹하고 시험을 주어 타락하게 하려고 애씁니다.  
  그렇다면 이 위험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야말로 새로남의 경험을 얻은 사람이 언제나 명심해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비결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곧 우리의 능력의 근원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거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골로새서 2장 6절). 마음에 예수를 주로 모시고 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곧 나를 죽이고 그리스도가 나를 주관하시게 할 때에 틀림없이 승리의 생활을 계속하게 될 것입니다.  




2010.12.27 15:42

제 9과 율법과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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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마태복음 5장 17절)..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로마서 6장 14, 15절).  

  율법이란 무엇이며, 복음은 무엇입니까? 율법은 세상 법률과 하나님의 법을 구별하기 위한 명칭으로, 성경상의 하나님의 법, 곧 십계명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복음(福音)은 한자의 뜻 그대로 ‘복된 소리’ 또는 ‘좋은 소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인류가 공로 없이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기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율법 
  먼저 법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법이 왜 필요할까요? 오늘날 우리는 신문지상에서 매일 같이 교통사고에 대한 기사를 읽을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사고가 자주 일어납니까? 교통 규칙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통 규칙은 모든 사람들이 다 안전하게 통행할 수 있기 위해 필요합니다. 교통 규칙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법이 사람을 행복하게 살도록 하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어느 나라나 법 없는 나라는 없습니다. 법 없이는 나라가 잘 다스려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 인류가 행복하고 평안히 살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율법을 제정하시고 그 율법의 정신에 따라 살도록 마련하셨습니다. 그런데 법이란 그 제정자의 정신을 나타냅니다. 세상 법은 세상 정치가의 정신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정신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불완전한 사람의 법은 한번 제정했더라도 실제로 응용해 보면 모순도 있고 결함도 발견되므로 오래지 않아 뜯어고치기도 하고 폐기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십계명은 완전하신 분이 제정하신 것이므로 모순이나 결점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일점 일획이라도 폐하지 않고 영원히 성취되어야 할 사랑의 법칙입니다. 이 사랑의 법칙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류를 탄생시키셨을 때 친히 인류의 조상에게 가르쳐 주시고 그 후 대대손손이 말로 전하여 내려온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계명이 수천 년간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어져서 불문율(不文律)로 전하여 왔으나, 사람들의 양심이 흐려지고 죄악이 더욱 심해감으로 그것을 글자로 기록하여 사람들이 잊어버리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친히 두 돌 판에 기록하여 모세에게 주시고 그것을 온 이스라엘 백성 앞에 반포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그것을 반포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당신의 계획을 성취시키기 위함이었으니, 이 백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전 세계에 선포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 백성을 세계의 중심지인 팔레스틴 땅에 거주하게 하시고, 그 민족 가운데서 인류의 구주가 탄생하도록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십계명
  그러면 하나님이 친히 두 돌 판에 쓰시고 또 이스라엘 백성에게 반포하셨던 영구불변의 그 사랑의 십계명은 대체 어떠한 내용입니까? 그 요점만을 기록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2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3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5

 네 부모를 공경하라….

 6

 살인하지 말지니라.

 7

 간음하지 말지니라.

 8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9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10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출애굽기 20장 3~17절).  


  이 십계명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계명에서 넷째 계명까지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규정한 것이요, 다섯째 계명에서 열째 계명까지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규정한 것입니다.  
  한번은 유대인의 율법사가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려 하였습니다. 율법사가 입을 열어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물으니,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장 37~40절)고 하셨습니다. 이 문답에 분명히 나타난 것같이 하나님의 율법의 정신은 사랑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것과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에 대해 뚜렷이 나타나 있습니다. 즉 처음 네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고, 그 다음 여섯 계명은 이웃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에 대한 방법입니다.
 
 
그리스도의 율법
  일반 기독교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구원은 율법을 행함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율법은 폐했고 구원은 믿기만 하면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태여 까다로운 율법을 지킬 필요가 있는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과연 율법은 폐했으며 무용한 것이 되고 말았을까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정말 그 신성한 율법을 폐하시기 위함이었을까요?  
  그렇다면 예수님 자신이 하신 말씀에서 그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태복음 5장 17, 18절).  
  만일 율법이 변경되거나 폐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께서 몸소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변경시킬 수 없는 까닭에 그는 사람의 형체를 취하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계명을 범한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대속자가 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율법의 불변성을 보여주는 가장 큰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율법이 쓸데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이해하기 곤란한 일입니다.
  2천 년 전에 율법이 필요했으면 오늘날에는 필요하지 않을까요? 인간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으며, 달라졌다면 더 악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매일 보도되는 범죄 사실이 얼마나 악질적이며, 얼마나 증가되어 가고 있습니까? 세상이 악할수록 법의 필요는 더욱 절실해집니다. 오늘날 사회의 형편이 이러한즉, 온 세계 인류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생활을 하였다면 이세상은 어찌 되었을까 한번 상상이라도 해볼 만합니다. 거기에는 개인의 행복이 깨어지거나 사회의 안녕 질서가 문란해지거나 할 두려운 범죄 사건이 없을 것이요, 전쟁은 그림자조차도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처럼 율법이 우리의 생활 기준이 되어야 할 시대는 다시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과 인간의 관계는 마치 레일과 기차의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차는 레일 위를 달려야만 안전합니다. 만일 레일에서 벗어나는 날에는 큰 변을 당합니다. 그와 같이 믿는 자들도 또한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문제에 대하여 말하기를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한일서 5장 1~3절)라고 하였습니다.  즉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죄 사함을 얻어 거듭남의 경험을 가진 자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결코 무거운 짐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과 반대되는 듯한 구절이 있으므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에 관하여 잘못된 생각을 가집니다. 그것은 바울이 기록한 갈라디아서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라디아서 2장 16, 21절).  언뜻 보면, 위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무방한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과연 그러할까요? 그렇지 않으면 요한의 말처럼 계명들을 지켜야만 할까요? 우선 이 중요한 문제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 
  믿으면 되지 율법은 지키지 않아도 좋다는 사람들은 이런 성경 구절을 인용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에베소서 2장 8, 9절).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입는 것, 즉 죄에서 구원함을 얻는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율법을 지키거나 선을 행한 대가로 얻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에베소서를 기록한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로마서 6장 14, 15절).  
  ‘법 아래 있다’는 말은 법을 지켜야 할 의무 아래 있다는 말이 아니라 법의 정죄 아래 있다는 말이요, ‘은혜 아래 있다’는 말은 죄인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의 사유함을 받은 상태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그리스도께로 나아가 그의 은혜로 사유함을 받고 침례를 받음으로써 그의 받아들이시는바 되어 율법의 정죄 아래 있지 않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이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무방할까요? 바울은 분명 그럴 수 없다고 단정하였습니다.  
  가령 한 죄인이 경찰에 붙들렸다고 합시다. 그 때에 그는 국가의 법률 아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재판을 받고 형의 선고를 받아 복역하다가 국가의 경사로 특사의 은전을 입어 방면되어 나오면, 그는 이제부터는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특사의 은혜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다시 범법 행위를 하여도 무방하겠습니까? 다시 죄를 범하면 또다시 범법자로서 교도소에 갇히게 될 것입니다. 그가 은혜 아래 있는 것은 법을 준수하는 동안뿐입니다. 그리고 그가 범법 행위를 하는 것은 그 특사의 은전을 저버리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도 이와 똑같습니다. 그 사람이 죄의 사유함을 받는 것은 다시 죄를 범치 않는다는 보증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생애를 삶으로써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자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병립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율법은 거울과 같아서 죄인으로 하여금 자기의 죄를 깨닫고 복음의 필요를 느끼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며, 복음은 죄인으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입을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될 수 있는 가능성 곧 율법을 준수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합니다. 그리하여 복음의 능력은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완전하게 하고 견고하게 합니다. 이 진리에 대해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로마서 3장 31절)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병행되어야 할 것이며,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는바 폐지된 율법은 도덕률인 십계명이 아니라 의식에 관한 예전률(禮典律), 즉 예수의 속죄 사업을 상징적으로 나타냈던 제사 제도에 관한 율법입니다. 참 것이 올 때에 모형이었던 것이 폐지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진 것은 바로 성전 의식의 폐지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2010.12.27 15:43

제 10과 안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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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한복음 14장 15절)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출애굽기 20장 8~11절).  
  예로부터 한국에도 7일씩을 세는 관습이 있어 왔습니다. 가령, 무슨 정성을 드리거나 신을 위하여 구별할 때 초칠일이니 삼칠일이니 칠칠일이니 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주일(週日) 제도는 최근 개화를 하면서 서양 풍습을 수입해 들인 것입니다. 더구나 일요일에 쉬는 규례는 우리나라가 양력을 사용하기로 채택하면서부터 생긴 것인데, 그리스도교가 한국에 수입되어 일요일을 예배일로 지키면서 더욱 일반화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은 일요일이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날로서 일반이 편안히 쉬고 즐겁게 지내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일 제도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 유래를 잘 아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중에서도 어떤 교파는 일요일을 지키고 어떤 교파는 토요일을 지키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주일 제도와 안식일의 기원에 대하여 연구해 보기로 합시다.
 

주일 제도와 안식일의 기원
  주일 제도는 역(曆)의 일부라고 볼 수 있지만, 이것은 천체의 운행 즉 해나 달의 운행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양력이나 음력은 해와 달의 운행에 따라서 만든 것이요, 각 절기들도 지구가 해를 한 바퀴 도는 기간 즉 1년을 24분 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간(週間)이라는 7일 제도는 천체의 운행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이것이 역(曆)의 일부로 뛰어든 것은 기이한 일입니다. 대영백과사전의 기록에 의하면 “주일은 7일의 주기를 가진 것으로, 천체의 운행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이 제도는 동양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태고 적부터 채용하여 왔다. 7일은 태양력이나 태음력의 1년 혹은 1년의 몇 분의 일이 되는 수가 아니기 때문에 모세의 기록을 부인하는 자들은 그 유래를 확실히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모세의 기록이라 함은 구약 성경 서두에 나오는 천지 창조에 관한 기록을 말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주일 제도와 제7일에 쉬는 것을 제정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세기 2장 1~3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십계명의 넷째 계명에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애굽기 20장 8~11절)고 하였습니다.  
  그런즉 안식일은 인류 역사의 시초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창조의 기념일입니다. 하나님이 이 날을 다른 날과 구별해서 신성한 날로 삼고 인류에게 명하사 이 날을 기억하고 이 날에 휴식하라고 하셨습니다. 특별히 기억하라고 하신 것을 보면, 사람들이 안식일을 잊어버리고 그 날을 속되게 지낼 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아셨던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안식일을 왜 주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엿새 동안 힘써 일하고 일곱째 되는 날은 쉬도록 마련하셨습니다. 그것은 피곤을 회복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피로를 회복시켜야 할 필요가 있지만, 당시에는 아직 죄가 세상에 들어오지 않은 때이므로, 인류가 농사를 지어도 피로를 느끼지 않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완전한 사람으로 창조되기는 했으나 역시 피조물의 하나였으므로, 자녀가 그 부모를 의뢰하듯이 하나님을 의뢰해야만 했었습니다. 자신들이 피조물인 것을 깨닫고 능력 많으신 하나님을 의뢰함으로써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분은 저들이 일주일 중 하루는 자기들의 일상 업무에서 떠나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과 지혜를 명상하고 하나님께 충성하고 감사하는 생각을 가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이 안식일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밀접한 관련을 맺는 날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너희로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 줄 알게 하리라”(에스겔 20장 20절).  
  이 말씀은, 안식일은 하나님이 사람을 거룩히 구별해서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는 표징이 되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안식일을 지킴으로 우리는 거룩히 구별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깊은 의미가 있으므로 안식일은 태초로부터 인간에게 축복의 날이 된 것입니다. 더구나 복잡하고 요란한 세상에서 일주일의 하루를 분주한 일상 업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분을 경배하고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우리 메마른 심령을 얼마나 풍부하게 하며 만족스럽게 하는가! 그리고 안식일마다 온 가족이 예배당에 나가고 야외에도 나가 하나님을 명상하며 단란하게 지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모습인가! 인류가 태초로부터 이 훌륭한 습관을 줄곧 가지고 내려왔다면 회의론자나 무신론자는 한 사람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온갖 비참한 사건들이 하나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안식일
  아담 이후로, 안식일은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기는 자들로 말미암아 거룩히 구별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어떤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신 이스라엘 민족조차도 안식일을 잊어버린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저들이 애굽 나라에서 노예가 되어 학대를 받던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아는 지식과 당신의 계명을 후세에 전하시려고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그 악한 환경에서 전부 구원해 내셨습니다. 그리고 저들로 40년 동안 시내 광야에서 방황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에 대하여 재교육을 받게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6장의 기록을 보면, 하나님께서 저들을 먹여 살리시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만나’라는 양식을 내려주셨는데, 이 일로써 매 주일 세 가지 기적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첫째는, 6 일간은 만나가 매일 내려도 제7일에는 내리지 않은 것이요, 둘째는, 처음 닷새 동안 거둔 만나는 이튿날까지 두면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 것이요, 셋째는, 제6일에는 갑절의 만나를 거두어 이튿날 안식일까지 두어도 냄새가 나지 않고 벌레도 생기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제7일에 만나를 거두러 나갔다가 거두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출애굽기 16장 28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만나를 내려주시려 할 때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출애굽기 16장 4절)고 하셨으니, 안식일은 곧 하나님의 백성의 충성심을 시험하는 시금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안식일에 관하여 여러 시대 동안에 종종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중에 가장 심각했던 것은, 저들이 바벨론 왕에게 멸망당하기 직전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미암아 이른 말씀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만일 삼가 나를 청종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지 아니하며 안식일을 거룩히 하여 아무 일이든지 하지 아니하면 다윗의 위에 앉는 왕들과 방백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되 그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거민들이 함께 그리할 것이요 이 성은 영영히 있을 것이며…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거룩케 아니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예레미야 17장 24, 25, 27절).
  이스라엘 민족이 안식일을 성별하여 지키고 지키지 않는 것은 당시에 있어서는 나라의 흥망을 결정하는 시금석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 경고를 무시했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이 바벨론 군대에게 함락되고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습니다. 그 후 70 년간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서야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는데 그 때에도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그 때에 내가 본즉 유다에서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귀에 실어 운반하며 포도주와 포도와 무화과와 여러 가지 짐을 지고 안식일에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식물을 팔기로 그 날에 내가 경계하였고…내가 유다 모든 귀인을 꾸짖어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안식일을 범하느냐 너희 열조가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이 이 모든 재앙으로 우리와 이 성읍에 내리신 것이 아니냐 이제 너희가 오히려 안식일을 범하여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임함이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느헤미야 13장 15, 17, 18절).  
  느헤미야는 이와 같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재난의 원인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안식일마다 예루살렘 성문을 닫고 파수꾼을 세워, 짐을 지고 출입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유대인의 랍비들은 안식일을 더욱 잘 지키기 위한 여러 가지 까다로운 세칙들을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는 옷감 한 조각, 바늘 한 개라도 가지고 다녀서는 안 되며, 주머니에 손수건 한 장도 넣고 다니지 못한다는 등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안식일을 한갓 형식으로만 지키게 되어, 이 날이 즐겁고 유쾌한 날이 되지 못하고 매우 괴롭고 거북하고 부자유한 날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약시대의 안식일 
  그러므로 신약 시대에 와서 예수께서는 이 안식일에 관한 확고한 견해를 가지고 몸소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는 안식일에 규례를 따라 회당에 출석하여 예배를 드리셨고, 당시 사람들의 안식일에 관한 그릇된 생각을 고쳐주시려고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마가복음 2장 27, 28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저들에게는 사람이 만든 39개조의 규칙과 기타 세칙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큰 속박이요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친히 안식일을 제정하신 분이시며, 그분이야말로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그분이 지키신 제7일이야말로 참 안식일이며, 그분이 지키신 방법이야말로 정당한 방법입니다.  
  한번은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고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물으니,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마태복음 12장 11, 12절)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등한히 해도 무방하다는 말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또 그분은 40년 후에 있을 예루살렘 멸망을 대비해서 이러한 권면을 주셨습니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마태복음 24장 20절).
  이것을 보면, 예수께서 안식일 지키는 것을 얼마나 중요시 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이후에 안식일이 폐지되거나 변경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예수님의 교훈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여신도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그 시체를 어디 두는지를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고는 안식일이 되므로 계명을 좇아 쉬었다고 하였습니다(누가복음 23장 56절 참고).  
  또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에 전한 위대한 사도 바울에 대해서도 기록하기를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사도행전 17장 2절),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일년 육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사도행전 18장 4, 11절)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여행하는 곳곳에서 규칙적으로 안식일을 지켰으며, 사람들을 가르치기에 힘썼습니다.  
  그러므로 참 안식일은 예수와 그 제자들이 지키고 사도 바울이 지킨 제7일, 즉 유대인들도 오늘날까지 계속 지켜 내려오는 바로 그 날 토요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일반 기독교가 토요일 대신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이것은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해서 다음 제4권 11과에서 자세히 연구하게 될 것입니다.  



2010.12.27 15:43

제 11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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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마가복음 7장 8절).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태복음 15장 8, 9절).  
  우리는 10과에서 안식일은 제7일 토요일이요, 이것이 십계명의 넷째 계명에 해당되는 날임을 이미 공부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일반 기독교가 이 토요일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고 일요일을 지키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거룩한 안식일이 어떻게 해서 주일(週日)의 제7일 토요일에서 제1일인 일요일로 변경되었을까요? 거기에는 무슨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적 사실을 더듬어 올라가 그 유래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일요일을 지키게 된 동기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수십 년간, 즉 1세기 동안에는 아무 문제도 없이 참 안식일을 지켜 내려왔음이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상 가장 나중(기원후 98년)에 기록된 요한의 세 번째 편지서 가운데도안식일의 변경에 관한 아무런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세기에 접어들면서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좇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디모데전서 6장 20, 21절)나는 일들을 하였습니다.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클레멘트(Clement)와 갈타코의 법률학자 터틀리안(Tertullian)이 그들의 저술에서 처음으로 일요일을 ‘주의 날’이라 기록하였는데 그들의 저술은 로마 가톨릭교회 신학 형성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2세기의 일입니다. 그리고 2세기에는 유대인들이 로마 정부에 대하여 세 번이나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로마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들을 심히 미워하고 박해하였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과 같은 안식일을 지키는 그리스도인들도 곤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으로 주목받는 것이 싫어서 주일 중 제1일에 집회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더러 생겨났습니다. 이리하여 안식일 지키는 일이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옮겨가는 계기를 이루었습니다.  
 

태양신 예배와의 관계
  그 당시 로마 나라에는 바벨론에서 전해온 일, 월, 화, 수, 목, 금, 토의 7요 제도가 이미 보급되어 있었습니다. 또 로마 나라 안에는 상당한 수의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으므로 저들은 성경상의 주일(週日) 제도, 곧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당시 로마 나라에서 가장 왕성했던 종교는 태양신을 숭배하는 ‘미드라’교였는데 이 ‘미드라’교를 믿는 사람들은 태양의 날인 일요일은 경축일이요 토성(土星)의 날인 토요일은 불길한 날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참 안식일을 지키는 데 지장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기원후 321년 3월 7일에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일요일 휴업령을 반포하여 참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이 더욱 괴로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관리들과 도시민과 직공들은 태양을 예배하는 날에 휴업하라”(Edict of March 7, 321 A.D. Corpus Juris Civilis Cod. 111, 12, 3)고 포고하였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에 입교했다고는 하나 내용적으로는 정략적인 의미가 다분히 있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기독교를 보호하는 것처럼 하여 기독교도들을 기쁘게 하면서 일요일 휴업을 기독교도들에게 강행시켰습니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일요일 휴업령으로 말미암아 태양신을 예배하는 대중의 마음을 사는 데도 성공하였습니다. 즉 종교를 통일시키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참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정권의 압박에 의하여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교회측의 타협적 태도
  이런 형편에서, 교회가 참된 그리스도교 정신을 가졌다면 이를 완강히 반대해야 할 것이었는데 괴이하게도 교회는 도리어 타협적으로 나갔습니다. 즉 교회는 세속적인 권세에 아부하여 진리보다도 편리주의로 나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기원후 364년경에 ‘라오디게아’ 종교 회의에서 아래와 같은 결의를 하였습니다.  
  종교 규칙 제29조 “그리스도인은 유대인들처럼 안식일을 게을리 보내서는 안 된다. 그 날에는 일해야 된다. 그러나 주의 날(일요일)은 특별히 존중해야 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이 날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일을 해서는 안 된다” (Hefele, A History of the Councils of the church, Vol. 2, p. 316).  
  정부에서나 교회에서나 일요일에 휴업하라고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무조건 맹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태양 예배일이 그리스도교의 성일이 되어버리고 그것이 오늘날에까지 미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하나님의 계명에 위배되는 모독 행위가 이렇듯 간단하게 실현될 수 있었는가가 의문스럽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중대한 반역 행위의 배후에는 사단의 활동, 즉 악마의 힘이 작용했다는 확증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바울은 이미 이 일에 관하여 예고하기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임하리니”(데살로니가후서 2장 3, 4, 7, 9, 10절)라고 하였습니다.  
  이 성경 구절에서 우리는 교회 자체 안에 적그리스도가 생긴다고 한 것을 주목하여야 하는데,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다”고 말하고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칭하는 자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사실이 구약 다니엘서에 더욱 분명히 예언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이 꿈에 본 네 짐승
다니엘은 ‘벨사살’ 왕 원년에 한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달랐다.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고, 둘째는 곰과 같은데 그것이 몸 한편을 들었고 그 입의 이 사이에는 세 갈빗대가 물렸으며, 셋째는 표범과 같은데 그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이 있고 그 짐승에게 또 머리 넷이 있으며, 넷째 짐승은 무섭고 놀라우며 또 극히 강하며 또 큰 철 이가 있어서 먹고 부숴뜨리고 그 나머지를 발로 밟았다. 이 짐승은 전의 모든 짐승과 다르고 열 뿔이 있는데, 다른 작은 뿔이 그 사이에서 나더니 먼저 뿔 중에 셋이 그 앞에 뿌리까지 뽑혔으며, 그 작은 뿔에는 사람의 눈 같은 눈이 있고 또 입이 있어 큰 말을 하였다”(다니엘서 7장 1~8절 요약)  
  다니엘이 꿈에 본 네 짐승은 곧 네 나라를 상징한 것인데, 사자는 바벨론, 곰은 메대 바사, 표범은 그리스, 넷째 무서운 짐승은 로마를 표상하였습니다. 그리고 넷째 짐승의 머리에 열 뿔이 있는 것은 로마에서 분열될 열 왕국을 상징하는데, 그 열 뿔 외에 다른 한 뿔이 나타났습니다.  
 

다른 작은 뿔
  이 작은 뿔에 관하여 다니엘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그 열 뿔은 이 나라에서 일어날 열 왕이요 그 후에 또 하나가 일어나리니 그는 먼저 있던 자들과 다르고 또 세 왕을 복종시킬 것이며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다니엘서 7장 24, 25절).
  이 작은 뿔은 다른 뿔들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하였고, “사람의 눈과 같은 눈이 있고 또 입이 있어 큰말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로마가 10개국으로 분열될 당시 10개국 이외의 어떤 특이한 권력이 로마 판도 안에서 일어났을까요? 이에 대하여 ‘A. C. V 후릭’이 쓴 중세기 교회의 기원이라는 책 150쪽을 보면, “정치적 로마의 폐허에서 정신적 대제국이 로마교회라는 거대한 형태를 가지고 일어났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한 작은 뿔은 곧 로마 법왕권을 상징한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예언은 이 작은 뿔이 세 뿔을 뽑을 것이라고 했는데, 과연 역사를 상고하면 헤룰리는 기원후 493년에, 반달은 534년에, 동고트는 538년에 각각 멸망당했습니다. 그 이유는 법왕권을 대적하는 이단 사상을 가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이 세 나라는 로마교가 이단시하는 ‘아리우스’파의 종교 사상을 가졌었기 때문에 멸망되었습니다.   
  1세기 이후에 그리스도교는 로마 나라 전국에 퍼졌으며, 주요 도시에는 어디에나 교회가 있게 되었습니다. 각 교회에는 책임자들이 있었는데, 그 중 로마교회 감독의 권력은 다른 교회 감독들의 권력보다 뛰어났습니다. 그리고 로마제국이 무너져 갈 무렵(기원후 476년경)에는 로마교회의 감독이 황제 다음가는 권력을 가졌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기원후 533년에는 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이 사실을 확인하듯이, “로마의 감독은 온 교회의 머리가 된다”(Code of Justinian, book 1, title)는 포고를 내렸습니다. 황제는 또 다른 기회에 “법왕은 이단자를 교화하는 권한이 있음을 인정한다”고도 선언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법왕권은 확립되었습니다.
 

법왕권은 무엇을 하는가?
  다니엘서 7장 25절을 보면 ⓛ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②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하며, ③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하며, ④ 한 때 두 때 반 때 동안 성도가 그 손에 붙인 바 된다고 하였습니다.  

1.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한다”함은 법왕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의 대리자’, ‘지상
의 하나님’, ‘우리의 주이신 하나님 법왕’, ‘세계의 왕’, ‘왕의 왕’, ‘주의 주’라는 칭호들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법왕은 결코 잘못됨이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P. F. L. Feraris, Ecc Lesiastical Dictionary ‘법왕’ 항 참조).  

2.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한다” 함은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한다는 것입니다. 중세기 암흑 시대 동안 법왕의 권위와 그 교리를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심히 박해해서 수백만 명의 순교자를 낸 사실은 역사가 증명합니다.  

3.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한다” 함은 법왕권이 하나님께서 태초에 제정하신 안식일을 제7일 토요일에서 주일 중 첫째날인 일요일로 변경한 사실을 말합니다. ‘피터 가이엘맨’이 쓴 천주교 교리 문답(The Convert's Catechism of Catholic Doctrine) 49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 : 안식일은 어느 날이뇨?  
답 : 토요일이 안식일이다.  
문 : 우리는 왜 토요일 대신 일요일을 지키느뇨?  
답 : 우리가 토요일 대신 일요일을 지키는 것은 천주교회가 ‘라오디게아’ 회의에서 성일(聖日)을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옮겼기 때문이다.  

  또 ‘스티븐 커난’ 저(著) 교리 문답(A. Doctrinal Catechism) 174쪽에는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습니다.  

문 : 교회가 축제일의 규례를 제정할 권위가 있는 것을 증명할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는가?
답 : 그러한 권위가 없었다면, 오늘날 모든 종교가가 동의하는 바 제7일 안식일 대신에 주일 중 첫날 일요일을 지키는 성경상으로 아무 권위도 없는 그러한 변경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1880년경 ‘엔라이트’ 신부는 “일요일을 거룩히 지켜야 한다는 것을 성경으로써 증명하는 자에게는 1천 달러의 상금을 주겠다”고 공중 설교 석상에서 여러 차례 선언했지만 오늘날까지 그 상금을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천주교회는 십계명 중에서 둘째 계명을 없애고 열째 계명을 둘로 나누었으며, 넷째 계명인 안식일 계명을 “주일을 지키고”라고 고쳐서 셋째 계명을 삼았습니다.  

4. “한 때 두 때 반 때 동안 성도가 그 손에 붙인 바 된다”고 함은 3년 반 즉 1260일, 성경상 예언 해석법대로 1260년간(에스겔 4장 6절 참고), 다시 말해서 기원후 538년부터 1798년까지의 법왕권 전성시대 동안에 성경의 원칙대로 살려는 성도들이 이단 박멸이라는 명목 아래 박해 당하였음을 의미합니다(이 문제는 다음 기회에 다니엘서 연구에서 더 자세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13장의 예언에 의하면, 1798년에 상함을 받은 법왕권은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저를 따른다”고 하였는데, 지금이야말로 이 예언대로 온 세상이 법왕, 즉 로마 교황을 따르려고 서두르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황은 세계 평화를 부르짖고, 온 세계의 기독교는 다 어미에게로 오라고 하며 통합하자고 외칩니다. 이것은 장차 큰 세력을 이룰 것이나 참 하나님을 따라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안식일이 충성의 시금석이 될 날이 이를 것입니다.  
 

어느것을 택하겠습니까?
  우리는 지난 과에서 안식일에 대해 공부했고, 본 과에서는 일요일에 대해 확실히 연구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제 어느 것을 택해야 할까요? 사람이 만든 계명을 따라야 할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야 할까요?  
  사도 바울은 이르기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로마서 6장 16절)고 하였습니다. 진리를 사랑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좇든지, 사단이 지배하는 세력에 굴복하여 멸망의 길을 취하든지 우리는 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이 교과를 연구하는 여러분은 현명한 선택을 하여 참 안식일을 준수하는 하나님의 참된 자녀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2010.12.27 15:44

제 12과 예수의 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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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히브리서 10장 37절)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에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죄에서 건짐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공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인류 구원의 대 사업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당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당신의 나라로 데려가시기 위하여 예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십니다.
 

세계의 종말과 예수의 재림
  제2차 세계대전이 원자 폭탄에 의해 종말을 고한 후로 그 두려운 핵무기는 놀라운 발달을 이루어 많은 사람들이 불안한 가운데서 미래를 내다보고 있으며, 유명한 정치가와 평론가와 지식 있는 이들은 현대 문명이 오래지 않아 파멸될 것이라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관하여 ‘윈스턴 처칠’은 말하기를 “만일 전쟁이 일어나면 교전 국가와…지구 전체가 파멸될지도 모른다”고 하였고,또 ‘빈세트 센’은 “현재의 사태는 이 유성(遊星) 위의 생명이 끝이 날 가장 극단적인 재난을 가져올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약 2천 년 전에 예수께서 예언하신 말씀을 이 말씀과 대조해 볼 때 그 너무도 정확한 묘사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함으로 기절하리니”(누가복음 21장 26절). 
이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께 조용히 와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태복음 24장 3절)라고 질문하였을 때에 그 대답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의 제자들이 재림과 세상 끝을 같은 때에 있을 것으로 생각한 점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종말이 예수의 재림으로 인해 이루어질까요? 아니면 핵무기로 인해 올까요? 이 의문에 대해서 요한계시록에는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요한계시록 11장 18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파괴자들의 손이 땅을 멸망시키기 전에 하나님의 손이 그들을 멸하실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이 세상은 능력의 손이 미치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핵무기의 희생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인간의 고안이 아님 
  6000년 동안 죄와 타락의 내리막길을 달려 내려온 이 세상은 오늘날에는 죄악이 관영한 모순투성이의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생활고와 질병 때문에, 탐욕과 불신과 증오 때문에, 인종적편견과 사상적 투쟁 때문에 하루도 평안함을 얻지 못하고 살육과 전투의 참혹한 모습만을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한 계획을 세우셨는데, 그것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이 세상에 보내시어 죄가 관영한 이 세상을 불로 없이하시고 선한 자들로만 당신의 나라를 새로 건설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의 재림에 관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베드로후서 1장 16절)라고 분명히 말하였습니다. 즉 예수님의 재림은 사람의 뜻으로 지어낸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전부가 하나님의 계시거니와 그 중에서도 예수의 재림과 세상종말에 관한 것은 더욱 중요하고도 흥미 있는 문제입니다. ‘오스카 로리’라는 저자는 이 사실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신약 성경 가운데 300번 이상 기재되었다. 마태복음에서 요한계시록까지 평균 25절마다 한 절은 예수의 재림을 말하였다. 예수의 재림을 직접적으로 예언한 것은 신구약 성경을 통하여 3,000번 이상 있다. 그리고 간접적으로 말한 것은 성경 전체에 1,000번 이상이나 된다. 구속에 관하여 한 번 말했으면 재림에 관하여는 두 번 말했다. 예수의 초림을 한 번 말했으면 재림에 관하여는 여덟 번이나 말했다. …성경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을 이유로 교리의 중요성을 판단한다면, 주의 재림은 가장 뛰어나서 어느 문제-구속 문제보다도 못하지 않은 위치에 있다. 이 세계 역사의 최대의 사건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큰 사건 중에서 가장 큰 사건인 재림에 대하여 고찰할 때에, 이것에 성경의 대부분이 제공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그리스도의 재림, 7, 8).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예수 재림의 교리가 하나님을 계시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이 약속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초림에 관해서는 구약 성경 중 300번 이상의 예언이 있는데 그것이 다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성경 예언 중 대부분이 이미 성취되었고, 몇 가지는 장차 있을 재림 시에 성취될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재림의 목적
  예수께서 왜 재림하시는가 하는 것은, 그가 재림하실 때 무슨 일들이 있겠는지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1. 모든 질고를 없이해 주심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이사야서 35장 4~6절).
“그 거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 거기 거하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이사야서 33장 24절)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립보서 3장 20, 21절).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 장애인은 온전한 몸을 가지게 되고, 병든 이는 건강한 몸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병들기 쉬운 이 몸이 다시는 병에 걸리지 않을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신기한 일입니까?  

2. 죽은 자가 부활함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 무덤 문이 열리고 예수를 믿고 자던 자들이 기쁜 소리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어린 자녀를 잃어버린 어머니의 팔에는 다시 사랑하는 아이가 안겨질 것이요, 또는 사망으로 오랫동안 헤어졌던 사랑하는 이들이 서로 손을 붙잡고 재회의 기쁨을 나눌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는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린도전서 15장 55절) 하는 승리의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인류는 과학의 힘으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대부분 극복했지만, 아직까지 죽음이라는 문제만은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망이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 영원히 해결될 것이니 이것은 사람의 지혜를 초월한 오묘한 이치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그 후에는 나중이니…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린도전서 15장 51, 52, 24, 26절).  

3. 하늘로 올리움을 입음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  이것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그 제자들과 약속하신 말씀의 성취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한복음 14장 1~3절).  
  오늘날은 인공위성과 우주선의 시대입니다. 그것들이 이미 달세계를 정복하고 오래지 않아 화성이나 다른 별들을 정복할 것이라고 합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예수님의 약속과 같은 약속을 성취시켜 줄 수는 없습니다.   

4. 정당한 보상을 받음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주리라”(요한계시록 22장 12절).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지만 사도 바울도 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디모데후서 4장 8절).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상만 받는 것은 아닙니다. 마태는 기록하기를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태복음 25장 31~41절)고 하였습니다.  
  선한 사람은 천국으로 맞아들여져 의의 면류관을 쓰는 기쁨을 누리지만, 악인들은 슬픈 경험들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담의 7대손 에녹은 그 이유를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유다서 14, 15절).  
  ‘경건치 않다’ 하는 말은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고 믿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불신앙, 즉 믿는 것을 거부하고 믿는 것을 업신여기고 경멸하는 태도는, 곧 심판을 받을 두려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장 7절)는 성경 말씀처럼 악인이 멸망하는 것은 스스로 취함이니 곧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믿지 않은 결과로 거두는 열매입니다.
 

현실로 나타날 일
  이상 말한 바와 같이, 예수의 재림은 전무후무한 대 사건이 될 것이요, 호화찬란한 극적인 사건으로 전개될 것이지만 결코 추상적이거나 환상에만 그칠 것이 아닙니다.  
  요한은 이르기를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요한계시록 1장 7절)라고 하였으며, 예수님 자신은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태복음 24장 25~27절)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재림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어느 한 장소에서나 비밀리에 될 일이 아니요 각 사람의 눈에 다 볼 수 있도록 공공연하게 될 일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에 천사가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사도행전 1장 11절)고 하였습니다. 과연 이 약속과 같이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눈에 볼 수 있게 오시되 구름을 타고 영광중에 오실 것입니다.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태복음 24장 30절).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데살로니가전서 4장 16, 17절).  
  그 때에 구원함을 받은 자들이 기쁨에 넘쳐 주님을 향하여 이르되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이사야서 25장 9절)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아니하고 그의 재림을 고대하지 아니한 자들은 슬프게 부르짖을 것입니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自主者)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요한계시록 6장 15).  
 

생각지 않은 때에 오심
  예수께서는 만인이 다 볼 수 있게 호령과 나팔소리로 강림하신다는 것을 위에서 공부하였습니다. 그러나 끝으로 한 가지 꼭 기억해야 될 것은, 예수께서 생각지 않은 때에 갑자기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부탁하시기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태복음 24장 44절)고 하셨으며, 사도 바울은 이르기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데살로니가전서 5장 3절)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날을 두려움 없이 맞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믿고 기다리는 생애를 살아야 할 것입니다. 기다리는 자는 자기의 모든 죄를 청산하고 자기가 해야 할 모든 책임과 의무를 다 완수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과 같이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요한계시록 22장 20절) 하고 그의 오심을 고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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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누가복음 21장 28절). 

  우리는 12과에서 예수의 재림에 관하여 공부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어떠한 모양으로 왜 재림하시는지를 공부하였습니다. 본 과에서는 그가 언제쯤 다시 오시는가 하는 문제를 공부할 것인데, 성경은 이에 관하여 분명히 말하기를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태복음 24장 36절)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정확한 날과 시간은 왜 아무도 모르게 하셨을까요? 이것은 아마 사람으로 하여금 항상 준비하고 지내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 날이 가까이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징조는 주셨습니다.  
 

 예루살렘 멸망의 전감
  예루살렘은 옛날 유대 나라의 수도요 정치적 종교적 중심 도시였습니다.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훌륭한 성전이 있었는데, 그 성전은 수천 명의 사람이 40년 이상 걸려서 건축했는데, 길이가 21.2미터, 너비가 10.6미터, 높이가 15,9미터나 되는 큰 대리석들이 사용되었다고 하니 그 규모의 굉장함은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이 예루살렘 성이 멸망할 것을 생각하시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시기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아이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마태복음 23장 37, 38절)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오실 때에 성전을 가리키며,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마태복음 24장 2절)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심히 놀랐습니다. 유대 민족의 자랑인 이 성전이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진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고 하면 그것은 세상 끝에나 있을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태복음 24장 3절)라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먼저 예루살렘 멸망에 관하여 대답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누가복음 21장 20, 21, 24절).  
  이 말씀은 설명할 필요도 없이 아주 명백합니다. 예루살렘이 외국 군대에게 에워싸이거든 지체하지 말고 곧 도망하라는 경고입니다. 그러면 과연 그런 사실이 있었을까요?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요 신학자인 사무엘 클라크 박사(A.D. 1675~1725년)는 “네로의 치리 12년에 시리아 총독 세스티어스 카라스가 대군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침공해 왔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예루살렘에 있었던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A.D. 37~97년)는 기록하기를 “세스티어스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하다가 함락시킬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예상과는 반대로 아무 이유도 없이 포위했던 것을 풀고 퇴각하였다”고 했는데, 이것은 기원후 66년의 일로,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예수의 말씀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예루살렘에서 모두 도피하였습니다. 그 후 기원후 70년에 이르러 로마 장군 타이터스가 제2차로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했는데, 그 때에 1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살육을 당하고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유병으로 죽었으며,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놓이지 않고 완전히 훼파되었습니다.  
  클라크 박사는 또 진술하기를 “예루살렘의 멸망에 있어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도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한 가지 실례만 보아도, 우리가 성경의 예언을 공부하고 때의 징조에 유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의 징조 
  1. 해가 어두워짐  
  세상 종말에 관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의 말씀은 아래와 같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마태복음 24장 21, 22, 29절).  
  1780년 5월 19일,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을 중심으로 해서 대낮이 갑자기 어두워지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대하여 1869년판 '웹스터 사전'은 ‘암흑일’이란 제목 아래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사람들이 집 밖에서 수 시간 동안 보 인쇄물을 읽을 수가 없었다. 새는 저녁 노래를 부르고 모습을 감추어 조용해졌다. 닭들은 홰에 오르고 짐승들은 외양간을 찾았다. 집들에서는 촛불들이 켜졌다. 암흑은 오전 10시경부터 시작해서 그날 밤중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이한 현상의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기록에 의하면 그날 밤의 달은 전면이 피처럼 빨갛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심판날이 온 것이라고 두려워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해가 어두워지는 때는 “환난 후에 즉시”라고 했습니다. 그 ‘환난’은 성경을 신앙의 기초로 삼는 그리스도인들이 당한 박해를 가리키는데, 이는 기원후 538년부터 1798년까지 1260 년간 계속된 박해입니다 (다니엘서 7장 25절;요한계시록 12장 6, 14절의 해석에 의함). 그러나 “그 날들을 감하리라”고 했는데, 과연 역사에 의하면 18세기 중엽에 신앙 자유의 길이 열리면서 사실상의 박해는 정지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암흑일은 박해의 기간이 마치기 전인, 그러나 사실상으로는 박해가 그친 뒤인 1780년에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성경상의 예언을 빈틈없이 부합시켰습니다.  

2. 별이 떨어짐  
암흑일 후에 있을 또 한가지 징조는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라고 했는데,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같은 사실을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요한계시록 6장 13절)라고 하였습니다. 이 예언은 1833년 11월 13일에 성취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일대학 교수 ‘옴스덷’은 미국 대백과사전 유성이란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833년 11월 13일 아침에 있은 유성을 볼 수 있었던 사람은 세계가 생긴 이래 또는 적어도 유사 이래 가장 놀라운 유성을 본 것이다.” 그리고 그 광경은 “북아메리카 전역에서 볼 수 있었고,…본 사람들은 그 수를 내리는 눈송이와 소나기의 빗방울에 비겼다”고 하였습니다.
  또 ‘찰스 영’은 그의 저서 ‘천문학 수첩(Manual of Astronomy)’에 기술하기를 “대지 유성우(遊星雨)로서 1833년 11월 12일 밤부터 다음날까지 계속된 사자좌의 별소나기처럼 굉장한 것은 또다시 보기 어려울 것이다. 어떤 지방에서는 그 수를 20만이나 셀 수 있었는데 그렇게 5, 6 시간을 계속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유사 이래 최대의 별소나기는 틀림없이 예수 재림의 징조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천연계의 게시판을 사용하여 마지막 때가 되었다는 것을 모든 인류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지식의 더함
  이 시대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지식이 급속히 더해진 사실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세계 역사의 종말, 즉 예수 재림의 날이 가까운 징조라고 성경은 가리킵니다. 다니엘의 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다니엘서 12장 4절).  
  이 예언의 말씀과 같이 다니엘서의 예언은 최근까지도 해석할 수 없는 봉함된 글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세기에 들어와서야 그 알 수 없었던 문구들을 해석하게 되어 성경 지식이 놀랍게 발전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과학 지식도 급속히 발달하여 원자 시대, 우주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주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는 모든 문명의 기구들은 어느 것이나 18세기 이전에 발명된 것은 거의 없습니다. 과학 지식은 더욱 고도로 발달되어 우주여행이 가능하게까지 되었다고 떠듭니다. 그런데 한 가지 두려운 사실은, 도의(道義)와 예절이 과학 지식의 진보와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것입니다. 원자력과 우주 로케트를 생각할 때에는 누구나 핵무기와 전쟁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는 그 결과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전쟁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예언했을까요?
 

전쟁과 전쟁의 소문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마태복음 24장 6절).  
여기서 ‘난리’라는 말이 다른 번역에는 전쟁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에는 전쟁과 전쟁 소문을 옛날보다 더 많이 듣겠다는 말입니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B. A. 소로킨’ 교수는 전쟁에 관한 흥미 있는 숫자를 발표하였습니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과거 2500년간 902회의 전쟁과 1,615회의 내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20세기 이후의 전쟁과 내란의 수는 그 이전의 8배나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후로는 전쟁의 수와 그 규모는 점점 더 증대해 갈 것이 틀림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누가복음 21장 26절)라고 예언하셨는데, 이 말씀은 과연 오늘날 핵무기에 대한 인류의 불안과 공포를 잘 표현하여 나타낸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종교 연합과 평화 운동
  핵무기의 공포 속에서 평화 운동도 확산됩니다. 평화 운동에 대해 말하자면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군비 축소 회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시 이 회의에 참가한 나라는 58개국이요 그 대표자 수는 2,500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별 성과를 얻지 못한 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국제연합의 알선으로 안전보장회의가 성립되어 때때로 군축 회의가 개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예기(豫期)하는 바와 같은 결론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일반이 잘 아는 사실입니다. 마지막 단계에 있어서 종교가 세계 평화에 크게 활약할 기회가 옵니다. 그리하여 전세계의 종교는 하나가 되자고 부르짖게 됩니다. 그리하여 평화 운동에 일치하는 보조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사건을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말일에…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이사야서 2장 2~4절)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르기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데살로니가전서 5장 3절)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종교 연합 운동과 아울러 제창되는 평화 운동은 인류의 최후의 노력이 될 것이요 오히려 그 입에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는 소리가 있는 “그 때에 멸망이 홀연히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훌륭하게 보이는 운동의 이면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을 적대하는 사단의 비밀이 내포되어 있음을 예언의 영의 가르침을 받지 않는 자로서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의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예언의 참 빛을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약소 민족의 흥기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마태복음 24장 7절).  
  민족 간의 알력과 나라 사이의 다툼이 끊일 사이가 없으면서도 민족들은 일어납니다. 이것 역시 마지막 시대의 징조로 지적되었습니다. 요엘은 이 사실을 예언하기를 “약한 자도 이르기를 나는 강하다 할지어다”(요엘서 3장 10절)라고 하였습니다.  
  1945년 8월 제2차 세계대전이 마치자 곧 인도네시아가 독립한 것을 시초로 하여 오늘날까지 많은 약소민족들이 독립하였습니다. 각자가 모두 우리도 독립 국가다, 타민족에게 예속되지 않는다고 부르짖습니다. 과연 스스로 "강하다 할지어다”라고 한 예언 그대로가 아닙니까?  
 

사회의 타락과 부패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디모데후서 3장 1~5절).  
  이것은 말세에 사람들의 마음과 생활 태도가 어떠할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 또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태복음 24장 37~39절).  
  지금으로부터 약 4,300년 전에 이 세상이 홍수로 멸망당한 일이 있었는데, 그 때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창세기 6장 5~7절)고 하셨습니다.  
  당시에 사람들이 너무도 타락하고 부패하고 정의에서 떠났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버려두실 수 없으셨는데, 마지막 시대의 형편이 꼭 그 때와 같을 것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과연 오늘날의 세상 형편은 그렇지 않을까요? 도덕상의 부패가 어디든지 충만하여 있습니다. 방탕함은 이 시대의 특별한 죄악입니다. 오늘날 청소년들은 남녀를 물론하고 도덕적으로 부정한 일을 행하여 몸과 심령을 파괴시키고 증오할만한 악습을 행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도덕의 표준이 떨어지고 청소년들의 범죄가 증가하고 성도덕이 극도로 문란한 적이 일찍이 없었습니다. 또 가정의 질서가 파괴되고 난폭과 향락과 독선과 자기만족만이 날뛰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무시하고 모독하는 경향은 얼마나 많습니까? 죄악이 성행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마지막 큰 위기가 박두하였다는 것이며, 세상이 멸망을 향해 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 복음의 의미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복음 28장 19, 20절)
  이 명령에 따라 오늘날의 복음 전도 사업은 굉장히 발전되고 있습니다. 우선 성경에 관하여 생각해 보아도, 옛날에는 한 책 한 책씩 붓으로 베껴 썼으므로 책은 귀중품 중에도 아주 고가(高價)의 것이었지만 오늘날은 인쇄술이 발달되어 성경이 누구의 손에나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1804년에는 대영성서공회, 1816년에는 미국성서공회가 창립되어 전 세계 방방곡곡에 성경을 보급시키고 있는데, 현재 1,431개 이상의 방언으로 번역 출판되어 마음의 양식이 되고 있습니다.  
  또 재림 기별을 전하는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활동만 하더라도 전도를 개시한 지 불과 150여 년 남짓한데 현재 전세계 226개 나라 중 197개 나라에서 전도 사업을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그 선전 방법도 여러 가지로 발달되어 구두(口頭) 전도, 문서 전도, 통신 전도, 라디오·텔레비전 전도, 위성 전도 등 온갖 방법을 다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태복음 24장 14절).  
  오늘날 복음이 급속도로 전세계에 전파되고 있는 것은 가장 확실한 재림의 징조입니다. 이밖에도 홍수, 지진, 해일, 폭풍, 흉년, 유행병 등 천재지변(天災地變)이 다 재림의 징조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는데, 말세가 가까울수록 여러 가지 재변(災變)은 날로 더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심상히 볼 수 없습니다. 재변 하나하나는 다 마지막 때가 되었다고 믿고 회개하라는 경고를 우리에게 줍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태복음 24장 32, 33, 44절).   




2010.12.27 15:45

제 14과 일천년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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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요한계시록 20장 6절 하단).  

  우리는 지난 12과와 13과에서 예수의 재림과 징조에 관하여 공부하였습니다. 하늘에 나타난 모든 이변과 땅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재난이 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날이 가까왔다는 징조라는 점을 배웠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재림하시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 재림 후 일천년 기간에는 무슨 일들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오늘 연구할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는 이 세상의 문화가 향상 발달되고 온 세계가 복음으로 화하게 되면 이 세상이 바로 평화롭고 행복한 복천년의 황금시대를 이루게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악인들의 죽음과 의인들와 부활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 이 세상의 모든 백성들은 하늘 저쪽으로부터 영광 가운데 천천만만 천사들과 함께 임하시는 예수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강림하시는 휘황찬란한 영광은 악인들과 악한 세상의 모든 가증한 것들을 소멸해 버릴 것입니다.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데살로니가후서 2장 8절).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지 않으면 아무도 생존함을 얻지 못할 것이니 예레미야가 예언한 바와 같이 될 것입니다.  
  “그 때에 나 여호와에게 살륙을 당한 자가 땅 이 끝에서 땅 저 끝에 미칠 것이나 그들이 슬퍼함을 받지 못하며 염습함을 입지 못하며 매장함을 얻지 못하고 지면에서 분토가 되리로다”(예레미야 25장 33절).  
  그 때에는 인류의 조상 아담으로부터 재림의 날까지 죽은 모든 의인들이 부활합니다. 살아 있던 악인들은 멸한바 되고 의인만 살아납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의인들은 부활한 의인들과 같이 죽지 아니할 몸으로 변화함을 입습니다. 그리하여 사망은 영원히 없어질 것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데살로니가전서 4장 16, 17절).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린도전서 15장 51~54절).
  그런데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은 부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의인들이 부활하고 승천해서 주와 함께 영원히 살 것인데 그 대부분은 이 세상에서 한 번 죽고 주께서 재림하실 때 다시 살아난 자들입니다. 즉 첫째 사망으로 죽었다가 첫째 부활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재림하실 때 그의 영광으로 죽임을 당한 자나 그 전에 병이나 사고로 죽은 악인들은 첫째 부활의 때에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들은 일천년 기간이 마치는 때에 부활하게 됩니다. 이것을 둘째 부활이라고 하여 첫째 부활과 구별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요한계시록 20장 6절)라고 말한 것입니다.
 

일천년 기간의 시작에 있을 일 

 1 

예수께서 영광 가운데 재림하심                  


 2

악인들이 재림의 영광으로 죽음

 

 3

죽은 의인들이 부활함 



 4

살아 있던 의인들이 변화함을 입음 

 5

모든 의인들이 승천함 

                                                                                           


  
 일천년 기간 중에 있을 일 
  그러면 이 일천년 기간에 죽은 악인들과 승천한 의인들은 어찌 되며, 무엇을 할까요?   

1. 악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자고 있을 것이요, 이 세상은 아무도 사는 이가 없이 황폐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그 때의 형편을 하나님의 계시로 보고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들을 우러른즉 거기 빛이 없으며 내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하며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내가 본즉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으며 그 모든 성읍이 여호와의 앞 그 맹렬한 진노 앞에 무너졌으니”(예레미야 4장 23~26절).  

2. 마귀는 갇힙니다. 즉 완전히 황폐된 아무도 없는 이 세상에 오직 홀로 있게 될 것이라고 사도 요한은 기록하였습니다.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벰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요한계시록 20장 1~3절).  
  여기 보면, 마귀를 1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가둔다고 하였습니다. 무저갱은 황무해진 이 세상을 가리키며,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한다 함은 이 세상에는 미혹을 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마치 옥에 갇혀 자유를 속박당한 것이나 같은 상태에 놓일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3. 성도들이 하늘에 가서 왕 노릇합니다. 사도 요한은 또 기록하기를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요한계시록 20장 6절)고 하였습니다. 왕 노릇한다 함은 첫째 사망으로 죽은 모든 악인들의 행위를 심판하는 일 즉 심사하는 일을 할 것을 의미함이니, 이에 대하여 요한은 기록하기를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요한계시록 20장 4절)고 하였습니다. 또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린도전서 6장 2, 3절).  
 

일천년 기간의 마침 
  일천년 기간이 마치면 예수께서 구원받은 성도들과 함께 하늘에서 다시 이 세상으로 강림하십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준비된 새 예루살렘 성이 이 지구상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산은 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스가랴14장 4절).  
  예수님의 발이 감람산에 서실 때에 산은 동에서 서로 갈라져 남과 북으로 나누일 것이요 그 가운데에는 큰 평원이 생기고 거기에 하늘로부터 영광스러운 새 예루살렘 성이 내려와 신세계의 수도로 좌정하게 됩니다.  

악인들의 부활. 예수께서 죽은 모든 악인들을 그 무덤에서 불러일으키실 것인데 이것이 둘째 부활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한복음 5장 28, 29절)고 하셨는데 이 말씀이 그 때에 성취될 것입니다. 인류 역사 이래의 모든 악인들이 다 부활할 것이므로 그 수가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을 것입니다. 물론 그 중에는 홍수전에 살던 거인들도 있을 것이요, 역사상 유명한 장군들이나 용사들도 있을 것입니다. 악한 천사들에게 옹위되어 있는 사단은 그 무수한 악인들을 바라보는 동시에 의인들과 거룩한 천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 예루살렘 성에 있는 것을 보고 그 마음에 야심이 다시 폭발할 것입니다.  

사단의 해방. “천 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요한계시록 20장 7절).  일천년 후에는 사단이 다시 해방됩니다. 즉 악인들이 부활했기 때문에 마귀는 이제 한 번 더 활동할 기회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악한 천사들과 장군들과 용사들로 더불어 공모하고 싸움을 위하여 군중을 조직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요한계시록 20장 9절), 이것이야말로 최후의 결투가 될 것입니다.  

둘째 사망. 언제든지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 싸움의 결과에 대해서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요한계시록 20장 9, 10절)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다시 살아날 수 없는 영원한 사망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한번은 사망을 당할 것이지만 첫째 부활에 참여하면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요한계시록 20장 6절)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참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계명을 지켜 주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첫째 부활에 참여해야만 할 것입니다.
 

일천년 기간의 마침 
  1.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땅 위로 내려옴.  
  2. 새 예루살렘이 땅 위로 내려옴.  
  3. 악인들이 모두 부활함.  
  4. 사단이 해방됨.  
  5. 마귀와 악인들은 영원히 멸망함.  

  구약 성경 말라기에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말라기 4장 1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남김없이 멸절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불에 타서 멸망될 때의 형편은 사람에 따라 다를 것으로 예상됩니다. 왜냐하면 각각 그 행위대로 형벌을 받는다 하였으므로 어떤 자는 잠간 동안 사멸될 것이요 어떤 자는 오랜 기간 혹은 여러 날 동안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결국은 자기들의 죄악을 시인하고 자기들의 멸망이 당연함을 승인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그의 처리하심이 공평 정대하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악인을 사르는 그 불에 대하여 ‘영원한 불’ 혹은 ‘세세토록 탄다’고 한 것은 영원히 소멸해 뿌리까지 없이한다는 뜻이요, 또 자기가 자기의 죄악을 승인하기까지 오래 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해석됩니다.
 

일천년 기간의 마침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요한계시록 21장 1절).  
  이 지구가 하늘에서 내려온 불로 말미암아 완전히 불살라져 죄악의 흔적이 깨끗이 사라지면 그 후에는 신세계가 건설됩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요한계시록 21장 5절).
  베드로는 그의 두 번째 편지에서 이 신세계에 대하여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베드로후서 3장 13절)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세계가 재창조되는 것입니다. 이 재창조되는 세계에 대하여 요한은 기록하기를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요한계시록 21장 3, 4절)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영감을 받은 한 종교 저술가는 새 세계를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성경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유업을 본향이라고 부른다(히브리서 11장 14~16절). 그 곳에서 크신 목자이신 예수께서 당신의 양떼를 생명수의 샘으로 인도하신다. 생명나무는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나무 잎사귀는 만국을 소성시킨다. 거기에는 수정같이 맑은 시내가 끊임없이 흐르고, 그 시냇가에는 바람에 나부끼는 나무들이 하나님의 구속함을 받은 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길 위에 그늘을 지어 준다. 그리고 넓다랗게 펼쳐진 평원에는 아름다운 언덕들이 솟아 있고 하나님의 산은 멀리 뒤쪽으로 봉우리를 들고 있다. 오랜 순례자의 나그네 생활을 마치고 유리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평화스러운 들과 그 생명강가에서 거할 집을 찾을 것이다”(엘렌 G. 화잇, 살아남는 이들, 영문, 430).  
  그러면 오늘날 괴로운 인생길을 걷는 우리가 그 새 땅의 주민이 되려면 어떠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까요?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베드로후서 3장 10~12, 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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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사도행전 20 장 35절). 

  우리 생활에 있어 돈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더구나 물질문명이 극도에 달한 오늘날에 있어서 돈의 필요성은 한층 더 절실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돈이면 만사 OK!”라는 유행어가 생길 만큼 금전만능 사상이 오늘날 모든 사람의 마음 가운데 깊이 뿌리를 박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돈에 대한 필요와 돈에 대한 애착이 없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는 돈에 대한 관념이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가르치기를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디모데전서 6장 17절)라고 하였습니다. 돈은 돌아가는 것이요 물과 같이 흘러가는 정함이 없는 것이므로, 그것을 의뢰하고 거기에 소망을 둘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우리 인류에게 공급해 주시기를 좋아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오직 그를 신뢰하라는 말씀입니다. 연세 드신 분들은 제2차 세계대전과 6.25동란의 쓰라린 경험을 통하여, 재물이란 것이 얼마나 신뢰할 수 없을뿐더러 생명의 장애물이 되기까지 하는지를 몸소 느끼고 체험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돈이 본래 악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돈 그 자체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어떻게 얻으며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돈은 선의 편이 될 수도 있고 악의 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돈에 대한 정당한 관념입니다. 돈에 대한 그릇된 애착심과 그것을 부당한 방법으로 얻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돈은 사람이 쓰기 위하여 준비된 것이요 지키기 위하여 준비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마땅히 돈의 지배자가 되어야지 돈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바른 의지력을 가지고 돈을 지배하는 사람보다는 돈에 대한 그릇된 애착심을 가지고 돈의 종이 되는 사람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리고 돈에 대한 그릇된 애착심은 사람을 죄의 구렁텅이에 빠져 들어가게 할 위험성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 점에 대하여 경계하였습니다. 자! 그러면 성경이 돈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를 살펴봅시다.
 

돈에 대한 올바른 생각 
  “그러나 지족(知足)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디모데전서 6장 6~10절).  
  위의 성경 말씀은 이 세상에서 돈을 모아 부자가 되려는 것의 허무함과 족한 줄을 아는 것의 참된 가치를 말한 것이며, 또한 돈을 사랑함이 만악의 근원이 되어 죄에 빠져 들어가게 하는 올무가 된다는 것을 경계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을 위해서는 마땅히 돈을 벌어야 할 것이지만 분수 이상의 사치와 향락과 자기만족을 위하여 돈을 탐해서는 안 됩니다. 돈을 탐할 때 무리한 일을 하게 되고 죄악에 빠지게도 되어 결국 자신을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 기자는 이르기를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언 30장 8, 9절)라고 하였습니다. 일상생활을 유지할 만큼의 돈을 가지는 것으로 족하게 여기는 사람은 참으로 안전하고 행복한 인생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재물과의 관계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편 24:1절).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개 2장 8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시편 50편 10~12절).  
  세계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가 창조하셨고 또 붙드시니 아무것도 그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만물을 인류에게 맡기고 분부하시기를 “정복하라”,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류는 만물의 관리자로서 그것을 운용할 수 있는 권리만을 가졌을 뿐이요, 만물의 소유주는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쓰시려면 아무것도 쓰지 못할 것이 없으시나 인류에게 관리권을 맡기셨으니, 인류를 통하여 당신이 원하시는 바를 행하도록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불쌍한 자를 돌보며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복음 사업을 위하여 희생하며 헌금을 드릴 의무를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혜와 힘을 주시고 또 기회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재물을 얻을 수 있도록 하십니다. 가령 농부가 논에 벼를 심어 양식을 만드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농부 자신의 힘과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때를 따라 햇빛을 비추시고 비를 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신명기 8장 17, 18절)고 하였으니, 우리 인간이 매일 생명의 능력을 받아 활동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그 은혜를 감사하는 정신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혹은 생각하기를, 내가 오늘날 이만한 재산을 가진 것은 내 힘과 내 노력으로 얻은 것인즉 또한 내 마음대로 쓰지 못할 것인가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부자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재물의 관리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정욕을 채우거나 자기의 교만한 마음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 재물을 함부로 낭비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에게 재산을 그냥 맡겨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십일조와 헌금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는 당신의 사업을 완성하기 위한 자금이 하나님의 재산을 맡은 사람들의 십일조와 헌금의 제도로써 성취되도록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준비하신 근본 목적은 당신의 필요를 채우시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고상하게 하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곧 십일조와 헌금을 드림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에서 악의 뿌리가 되는 탐심을 제거하고 관대한 마음을 가지게 하는 동시에 자신들이 축복을 체험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주일 중 하루를 안식일로 구별하여 지킴으로써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이신 것을 기억하게 함과 같이, 수입의 10분의1을 바침으로써 하나님이 만물의 소유주이신 것을 기억하게 함이 십일조 제도의 근본 목적입니다. 
  모세가 기록하기를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레위기 27장 30절)고 하였고, 솔로몬은 이르기를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잠언 3장 9, 10절)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마땅히 그 수입의 10분의 1 즉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치되 그것을 맨 먼저 하나님께 바칠 것이니, 이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룩히 구별한 성물이기 때문입니다. 이 제도야말로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만큼 아주 공평하고도 단순한 방식으로 되었습니다.
  예컨대 만원을 버는 사람은 천원, 오천원을 버는 사람은 오백원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농사하는 사람은 농사짓는 데 드는 비용 즉 종자, 비료, 일꾼, 농약 등을 위한 비용을 제한 순이익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며, 장사하는 사람은 상품 구입비, 운반비, 인건비, 각종 세금 등의 비용을 제하고 남은 순이익의 10분의 1을 하나님의 복음 사업을 위하여 드려야 합니다. 수확의 많고 적음과 이익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꼭 10분의 1을 드려야 합니다. 부자라고 더하지 않고 가난하다고 덜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확히 10분의 1을 요구하십니다. 그리하여 이 10분의 1로써 하나님께 봉사하는 특별한 직무와 그 직무를 가진 이들의 생활을 공급하도록 계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에는 이것이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되었고,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교회의 전도 사업과 그 종사자들의 생활비로 공급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르기를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린도전서 9장 13, 14절)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도 십일조에 관해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태복음 23장 23절)고 하셨습니다. 이 경우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적 행위를 경고하지만 오히려 십일조의 실행을 소홀히 할까 염려하여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물론 형식적인 십일조가 아니라 정성을 다한 정확한 십일조를 내야 할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교훈을 따라 정확한 십일조를 드렸다면 저들은 물질적 또는 영적 축복을 넘치도록 풍성히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복음 사업은 현재보다 더 확대되고 영혼을 구원하는 추수는 신속히 마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여러 교회가 성경에 지시한 대로 십일조 드리기를 가르치지 않고 기타 방법으로 이기적인 일시적 명예심에 호소해서 헌금하도록 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요, 다시금 예수님의 경고를 받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십일조 외에도 자원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드리는 것을 권장했습니다.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신명기 16장 16, 17절).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궁정에 들어갈지어다”(시편 96편 8절).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당에 나아갈 때에는 반드시 감사하는 예물을 가지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오늘날은 마지막 긴급한 기별을 전해야 하는 때이므로 각 사람은 한층 더 분발해서 희생적으로 헌금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이 이 귀한 하나님의 기별을 받은 기쁨과 특권을 생각할 때, 흑암 가운데서 방황하는 불쌍한 동포들을 위하여 좀더 희생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축복과 저주
  십일조와 예물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물의 창조주시요 소유주이심을 승인하는 동시에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정신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주는 것은 곧 사랑입니다. 주는 일을 계속할 때 사랑하는 정신은 더욱 고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사업을 위하여 드리기를 좋아하는 자들을 축복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라기 3장 10~12절).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재산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을 때에는 그는 범법자로서 저주를 받게 됩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말라기 3장 8, 9절).  
  이스라엘 민족사를 살펴보면 저들이 안식일을 잘 지키고 십일조를 신실히 드리며 성전 봉사에 충성할 때, 즉 그들의 종교가 왕성할 때에는 국가가 번영했지만 그들의 종교가 쇠퇴하여 안식일을 신실히 지키지 않고 십일조도 드리지 아니하여 하나님께 봉사하는 일에 소홀했거나 폐지되었을 때에는 그 나라도 쇠퇴하거나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아 노예로 사로잡혀 가는 운명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위의 말라기의 축복과 저주는 곧 이스라엘 민족의 여러 시대 동안의 경험에 나타난 사실입니다.   
  또한 구약의 역사를 보면 개인의 생애에서도 이 사실이 현저히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소득의 10분의 1을 하나님의 제사장에게 드렸는데 그는 동방의 큰 부자가 되었으며, 그의 손자 야곱은 빈손을 들고 집을 떠났지만 20년 후에는 많은 가족과 큰 재산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이는 그가 떠날 때 하나님과 약속한 십일조를 성실히 드린 결과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야곱을 축복하신 하나님은 오늘날도 변함없이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하신 그 약속을 지키고 계십니다.  
  미국의 ‘존 록펠러’는 첫 월급 50불에서 10분의 1을 교회에 바쳤는데 후에 석유왕이 되었고, ‘카네기’도 십일조를 드렸는데 강철왕이 되었으며, 또 비누와 치약으로 유명한 ‘콜게이트’도 최초의 수입에서 정확한 십일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멘소레담’을 처음 만들어낸 ‘H. H. 하이드’도 십일조를 실행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또한 ‘크라이드 하리스’는 가난한 집 아들로 젊었을 때 직공 생활을 하였으나 후에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이 되어 조그마한 상자 제조업을 시작하면서 십일조를 신실히 드렸는데, 그 결과 그의 사업은 해마다 발전되고 확장되어 1960년경에는 700여명의 직공을 거느린 세계 제일의 가구 공장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1963년에 3,000만 불 가치의 공장과 현금 800만 불을 교회에 기부하여 온 세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돈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고 신뢰하는 자를 축복하셔서 10분의 1 이외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많은 예물을 드리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대신 돈만 믿고 돈에 대한 애착 때문에 돈의 종이 되어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행하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의 종말이 얼마나 처참한가를 우리는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왕은 이르기를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언11장 24, 25절)고 하였습니다.  
  과연 깊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그리고 실천에 옮겨서 하나님의 약속을 체험해 볼 일입니다. 우리가 비록 약간의 금전을 바친다 한들 우리에게 만물을 주시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주신 그 크신 은혜를 만분의 일인들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의 이러한 작은 정성이라도 어여삐 받아주시고 축복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태복음 6장 20, 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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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죽으면 소멸되나니 그 기운이 끊어진즉 그가 어디 있느뇨”(욥기 14장  10절)  
 
  세상에서 슬픔과 고통을 당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망의 슬픔보다 더한 슬픔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망은 높은 자나 낮은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가리지 않고 언젠가는 이르고 맙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누구나 생각해 보아야 할 중요한 문제 중 하나입니다.  
  사후 문제는 모든 종교가 중요하게 취급하는 교리의 요점이며, 철학이나 과학도 이것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왔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직도 사망의 공포에서 해방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사망의 공포를 느끼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사후의 형편을 충분히 알지 못하거나 사후의 형편에 대한 그릇된 생각이 마음을 지배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죽은 후에야 어떻게 된들 상관없다고 대단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죽은 후의 형편이 어떠함을 앎으로써 그의 생존할 동안의 생활 태도가 좌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죽은 후에도 영혼은 살아 있을까요?
  사후의 문제는 경험으로 판단할 것이 못되므로 의견이 각각 다릅니다. 종교가 다르면 그 생각이 다른 것은 당연하지만, 같은 기독교 내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곧 천당에 간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혹은 연옥으로 가서 이 세상에서 마치지 못한 죄의 값을 다 갚도록 고통을 당한다는 연옥설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사후 문제에 관한 의견이 각각이지만 이것을 요약하면, 사람이 죽은 후에 그 육체를 떠난 영혼이 있는가, 없는가 또는 죽은 자가 어떠한 형체로 생존을 계속하는가 하는 두 가지 문제입니다. 그런데 동서양의 각 종교를 살펴보면 모든 종교는 거의 다 영혼의 존재와 불멸을 믿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런 중에서 유독 성경만이 이것을 강하게 부인하는 데에는 무슨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일반 기독교 역시 영혼 불멸설을 믿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기이한 현상입니다.
 

영혼 불멸설의 출처 
  이 기이한 일의 이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의 미혹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4과에서 이미 연구한 바와 같이,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시기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세기 2장 17절)고 하셨는데, 사단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세기 3장 4절)고 말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도록 하였습니다. 
  그 후로 사단은 계속 인류를 속여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주장함으로써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을 방해해 왔습니다. 우리가 만일 사단의 말을 믿는다면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에스겔 18장 4절)는 하나님의 엄숙한 말씀은 믿지 않게 될 것이요, 따라서 제멋대로 방종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구주의 필요를 느끼지도 않게 될 것입니다. 사단은 바로 여기에 목적을 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과 영혼 불멸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장 16절).  
  이 말씀은 기독교의 중심 문제를 가장 간단명료하게 표현한 유명한 구절입니다. 우리가 읽은 바와 같이 구원의 필요는 인간이 멸망하여 없어진다는 사실 위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불멸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다는 것이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믿는 것도 아주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참으로 영혼 불멸을 믿는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요 모순된 일입니다.  
 

인체의 구성 
  사망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먼저 생명에 대하여 깊이 상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생명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세기 2장 7절).  
  이 말씀은 지극히 간단하기는 하지만 인체의 구성에 대하여 요점을 말한 것입니다. 처음에 사람은 흙으로 빚어졌습니다. 그러나 아직 생명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자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즉 두뇌는 생각을 하게 되고 신체의 기관이 그 기능을 발휘하는 산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치 전구에 전기가 통할 때에 빛을 내는 것과 같습니다. 육체를 전구라고 하면 생명의 기운은 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이 연합하여 생령 곧 산 사람이 생긴 것입니다. 만일 전기가 끊어지면 전구만 남고 빛은 없어집니다. 그럴 때 그 빛은 어디로 간 것이 아니라 없어지고 만 것입니다. 사람도 이와 똑같은 이치입니다. 전기와 같은 생명의 기운이 없어지면 죽는데, 그 때 남는 것은 생명의 없는 육체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반적으로 믿는 바와 같이 혼이나 영혼이 따로 떨어져 있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 영, 영혼 등의 근본 뜻
  사망은 곧 생명의 반대입니다. 시편 기자는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시편 104편 29절)라고 하였고, 솔로몬은 기록하기를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도서 12장 7절)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신’이라고 번역한 말은 원문 성경 히브리어의 ‘루아흐’(Ruach)이라는 말인데, 호흡, 바람 등의 의미를 가기고 있습니다. 위에 인용한 시편의 ‘호흡’이라는 말과 전도서의 ‘신’이라는 말은 원어로는 똑같은 말이므로 신이라는 말에 특수한 의미를 포함시킬 수는 없습니다. 동양 언어로 신이라고 하면 육체를 떠나서 독자적으로 생각할 수 있고 행동도 할 수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성경적인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전도서 12장 7절의 ‘신’은 욥기 34장 14절의 ‘기운’,욥기 27장 3절의 ‘하나님의 기운’과 똑같은 원어를 번역한 말입니다. 그리고 욥기 12장 10절의 한국어 번역은 “생물들의 혼과 인생들의 영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인데, 이 구절의 일문(日文) 구어역을 한국어로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모든 생물의 목숨 및 모든 사람의 호흡은 그의 손안에 있다.”  
즉 ‘혼’과 ‘영’을 ‘목숨’과 ‘호흡’이라 번역하였습니다. 원어에 충실하자면 일문 번역이 바른 번역입니다.  
  신약 성경 가운데 ‘영’ 또는 ‘영혼’이라 번역한 말은 고대 헬라어의 ‘프뉴마’(Pneuma)라는 말인데, 이것 역시 ‘바람’, ‘호흡’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루아흐’과 같은 의미입니다. 실례로, 야고보서 2장 26절의 ‘영혼’이라는 말을 ‘호흡’이라는 말로 바꿔서 생각해 봅시다.  “영혼(호흡)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영’이나 ‘영혼’이라 한 말은 동양 사람들의 종래의 관념대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숨’이나 ‘호흡’이라는 의미로 생각하면 그 근본 의미를 잘 파악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본래 하나님께서 주셨던 ‘생명의 기운’ 즉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요, 그 결과로 생활 기능을 잃고 육체가 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죽음의 상태 
  사람이 죽은 후에 영혼이 없다고 하면 그 이상 더 생각할 필요가 무엇입니까? 그러나 성경에는 사람의 사후 상태가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사단이 사람의 사후 상태에 대하여 여러 가지 그릇된 사상을 퍼뜨릴 것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 예방책으로서 준비하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사후 상태를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한번은 예수께서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한복음 11장 11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는 죽음을 잠들었다고 말한 데가 53곳이나 되는데, 이것은 영원한 잠이 아니라 부활하는 날까지 자는 잠입니다. 그 자는 동안이 몇 천 년이 될지라도 아무 의식이 없기 때문에 당사자에게는 잠깐 동안 자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만에 부활했는데 그는 죽었을 동안의 아무 경험도 말한 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생각과 같이 죽어 곧 천당에 갔다면 구태여 다시 부활시키실 필요도 없었을 것이요, 부활시키신다 해도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시지 않고 “나사로야 내려오너라”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무덤에서 자다가 일어나 나온 것입니다. 아무리 독실한 신자라도 죽어서 곧 하늘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베드로는 대중 앞에서 연설하면서 다윗의 죽음에 대하여 말하기를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다”(사도행전 2장 29, 34절)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곧 승천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장사지낸 지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자기에게 가까이 오는 마리아에게 이르시기를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요한복음 20장 17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모름
  사람이 깊이 잠들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 지 오래니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전도서 9장 5, 6절).  
  “산 자는 알되 죽은 자는 모른다”는 것은 산 자와 죽은 자의 근본적인 차이점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의식과 감각이 완전히 없어져서 산 자의 세계에서는 소멸되고 맙니다. 사람이 죽어 귀신이 되어 은혜를 갚거나 원수를 갚는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욥이 이르기를 “그 아들이 존귀하나 그가 알지 못하며 비천하나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욥기 14장 21절)라고 하였습니다. 생전에 아무리 그 자녀를 사랑했을지라도, 죽은 후에는 그가 잘 되는지 못 되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또 시편 기자는 이르기를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시편 115장 17절)라고 하였으니, 아무리 독실한 신자라도 죽은 후에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할 것입니다. .  
 

불사의 길 
  사도 바울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브리서 9장 27절)라고 하였거니와 사람은 선인이나 악인이나 다 한번은 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래 불사의 성질, 즉 ‘죽지 않음’을 가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불사의 조건을 이행하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명하시기를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세기 2장 16, 17절)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는 그 명령을 불순종했기 때문에 죽어야 할 인간이 되었고 또 그 소질과 품성을 받아 가지고 나온 인류도 하나님께 순종할 힘을 잃어버리고 사망의 줄에 얽매인바 되었습니다.  
  “죽지 않음”은 오직 순종이라는 조건하에서만 얻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에 나아갈 길을 막아 저희로 하여금 영생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불순종하는 죄 많은 인간이 오래 산다는 것은 오히려 불행을 더 지속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인간은 처음부터 본질적으로 불사(영혼)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죽어야 할 불쌍한 인간에게 죽지 않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 길은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디모데전서 6장 16절)는 하나님만이 여실 수 있는 길입니다. 즉 그가 독생자를 주심으로 아들을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성으로서 우리와 같은 육체를 쓰시고 세상에 오셔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그 몸을 드리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킨 사람처럼 받으시는바 됩니다. 다시 말하면 믿는 그것으로 인하여 순종이라는 불사의 조건이 충족되고, 그는 영생을 얻게 됩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요한은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한일서 5장 11, 12절)고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믿기만 하면 곧 불사의 몸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불사의 특권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취는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이루어집니다.  




2010.12.27 15:46

제 17과 영과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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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마태복음 24 장 11절)    

  우리는 16과에서 사람이 죽으면 의식이 전혀 없고 세상과는 아주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성경 말씀은 매우 명확하고 분명하므로 우리가 이지(理知)로서는 그 사실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의문스러운 점이 남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요? 이는 전래된 사상과 습관의 영향도 있으려니와 사람이 죽은 후에 영혼이 살아남아서 활동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 영계(靈界)의 이상한 현상에 관한 이야기와 또는 그런 경험에 대해서 많이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계라고 하면 으레 죽은 사람의 세계를 연상하게 되는데, 죽은 사람의 영혼과의 교통은 문명이 개발되지 않은 시대일수록 더욱 성행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원시 종교에서는 이것이 부속물처럼 따라다니는 것으로 무당이 굿하는 것이나 판수들이 경을 읽는 것들이 모두 신이나 영과 교섭을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심령술 혹은 강신술이라 해서 현대적인 접신(接神) 행위가 대대적으로 행해지는데 그 방법도 아주 변화되어 과학을 숭상하는 현대인의 심리에도 잘 영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이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신체에 악성 종양이 생긴 환자가 죽은 사람의 영에게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영이 인간과 교섭을 가질 때에는 언제나 영매라고 부르는 술자(術者)를 중간에 세우는데, 이 경우에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현장에는 수술용 기구가 하나도 없었으나 환부가 무사히 제거되고 병이 나았습니다. 환자는 수술시 느낌에 대하여 “손이 뱃속에 들어가 닿는 것 같았다”고 말하였습니다. 떼어낸 환부는 모 유명한 병원에서 병리 실험을 거친 후에 표본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죽은 사람의 영이란 무엇입니까?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 지 오래니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전도서 9장 5, 6절).  
  이 성경 말씀에 의하면, 죽은 사람의 영이라고 하는 것이 나타나 어떤 기이한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분명 죽은 사람의 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기만자에 대하여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한복음 8장 44절)고 하였으니, 이는 곧 마귀를 지적한 말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세기 2장 17절)고 하셨는데, 그 때에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과는 정반대로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세기 3장 4절)고 하여 하와를 속였습니다. 그 후로 마귀는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산다”는 생각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어주기에 매우 애를 썼습니다. 마귀는 곧 영혼 불멸설의 수창자(首唱者)요 강신술의 장본인입니다. 그에게는 무수한 부하들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반역하여 하늘에서 내어 쫓겼습니다.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벰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요한계시록 12장 9절). 
  우리 각 사람에게는 보호하는 천사가 한 명씩 따라다닌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는데(마 18장 10절 참고), 마귀도 그 부하들을 한 명씩 보내어 예수의 구속 사업을 방해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소위 심령술이니 강신술이니 하는 것으로 죽은 사람의 모양과 목소리를 흉내 내어 죽은 사람인 것처럼 속이는 것은 곧 죽은 사람을 따라다니던 악한 천사들일 것입니다. 그는 죽은 사람의 생전의 온갖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능히 그를 모방해서 죽은 사람의 흉내를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결코 죽은 사람의 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요 사단의 부하들이 나타나 진리를 혼란시키기 위하여 활약하는 것입니다.  
 
 
사단의 속임수
  마귀가 기이한 일을 행하는 것은 다만 사람들을 즐겁게 하거나 호기심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소위 죽은 사람의 영이란 것이 말하는 경향을 살펴보면, 사람의 인격과 품성을 높이는 데 유익한 이야기들은 별로 하지 않고 다만 사별한 사람과의 애정을 북돋우는 고인(故人)의 목소리, 태도, 취미, 습관 등을 그대로 나타내어, 사람은 결코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도록 유도할 뿐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일단 그 속임수에 빠지게 되면, 그 후로는 어떤 이야기를 하든지 그 말을 믿게 됩니다. 사단은 이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사람들을 속이려고 애씁니다.  
  그는 또 영원 hell설이라는 것을 만들어냈습니다. 즉 사람이 죽으면 선한 사람은 천국이나 극락에 가고 악한 사람은 hell에 가서 영원토록 고통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하나님을 무자비하고 악한 임금으로 잘못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많은 정직한 사람들이 회의론자나 무신론자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고대 강신술 
  강신술은 옛날에도 세계 각처 어디에나 있던 미신의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던 당시만 해도 이것이 상당히 성행했던 모양인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엄중히 경계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그 영향을 미쳤으며, 마침내는 왕까지도 미신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전쟁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블레셋 군대들이 수넴에 올라와 진을 치니 사울 왕이 보고 몹시 두려워하여 떨었습니다. 그리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어떻게 할 것인지를 여쭈어보았으나 대답이 없었습니다. 이에 사울왕은 마음이 초조하여 변장하고 엔돌에 있는 신접한 여인에게로 가서 죽은 사무엘을 불러올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사무엘은 살아 생전에 하나님께 충실했던 선지자이므로 그를 통해서 혹 하나님의 지시를 얻을 수 있을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신접한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왕에게 이르기를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하니, 사울이 이르기를 “그 모양이 어떠하냐”고 하였습니다. 여인이 대답하기를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였습니다.  

사무엘 :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로 분요케 하느냐.”  

사 울 : “나는 심히 군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지 아니하시기로 나의 행할 일을 배우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사무엘 :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여호와께서 나로 말씀하신 대로 네게 행하사 나라를 네 손에서 떼어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치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사무엘상 28장 1~19절 참고).  

  이 사실을 언뜻 보면 죽은 사람의 영과 교통한 것처럼 생각되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모순들이 발견됩니다.  

 1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대답하시기를 그쳤다고 하면, 죽은 사무엘을 일부러 불러 올려서 그에게 대답하게 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2

 그가 정말 사무엘의 영이라면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사울의 경배를 신실하고 경건한 그가 받았을 리가 없습니다.

 3

 죽은 사람의 영이 말을 한다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맞지 않습니다.

 4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즉 죽으리라는 예언이 맞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죽임을 당한 것은 수일 후였고, 그것도 세 아들만 죽었으며, 남은 아들은 다른 때에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은 사무엘의 영과 교통한 것이 아니요 마귀의 속임에 빠진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옛날부터 무당이니 판수니 하는 이들이 죽은 사람의 혼을 부른다고 하지만 그것들도 모두 마귀의 기만행위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에 속지 말도록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경고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레위기 19장 31절).  

  “남자나 여자가 신접하거나 박수가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 곧 돌로 그를 치라”(레위기 20장 27절).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이사야서 8장 19절).  
 
  여기서 마술이나 무당이나 박수나 신접자라 함은 다 죽은 자들과 교통하는 자들을 말함이니, 그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마귀와 교통하는 자들입니다. 성경은 이런 자들을 “살려두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현대 강신술
  1848년 3월, 미국 뉴욕 주 하인즈빌에 있는 ‘존 D. 폭스’라는 사람의 집에서 현대 강신술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집에는 본래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으나 그는 때때로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기분이 나빠서 다른 데로 이사 가고 말았습니다. 그 후 이 ‘폭스’의 가정이 이사 왔는데,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어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1848년 3월이 되면서 그 소리는 ‘마가렛’(15세)과 ‘게이트’(13세)라는 두 딸의 침실 편에서 더 잘 들을 수 있었습니다. ‘게이트’는 이상히 생각하고 소리 나는 데를 향해서 ‘똑똑’ 하는 신호를 하면서, “귀신아, 내가 하는 대로 해 보아라” 한즉 그 쪽에서도 역시 ‘똑똑’ 하고 신호가 왔습니다. 하루는 ‘폭스’ 부인이 “이 소리 나는 것은 사람이 장난하는 것이 아니냐, 소리로 대답하라” 하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 후 “만일 귀신이면 두 번 똑똑 소리를 내라” 하니 ‘똑똑 똑똑’ 두 번 소리가 났습니다. 부인이 매우 흥미로워서 이 이상한 통신법을 시험해 보는 동안 하루는 ‘찰스 B. 로스마’라는 사람이 영이 보내는 기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기별에 의하면, ‘로스마’는 ‘폭스’가 살기 전에 이 집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인데, 그 시체가 마루 밑에 묻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파보니, 과연 거기서 백골이 나왔습니다.  
  그 후로 ‘폭스’의 딸들은 때때로 영과 교통을 했는데, 사람이 무엇을 잃어버리거나 하면 영에게 물으러 오곤 해서 소문이 널리 퍼졌습니다. 이를 계기로 현대 강신술이 유럽과 세계 각처에 알려져 여러 단체를 조직하게까지 되었습니다.  
  1882년에는 켐브리지 대학 윤리학 교수 ‘헨리 시쥬웨이’를 중심으로 한 심령연구협회가 생겼으며,1893년에는 미국 심령술협회가 조직되었습니다.  
  영국 물리학자 ‘오리마로찌’경(1851~1940년)이 리버풀 대학 교수 겸 버밍햄 대학 총장이며 또한 왕립 과학원의 요직에 있으면서 영국 심령협회장을 겸임하고, 심령술 즉 강신술에 열성이었다는 것은 너무도 유명한 사실입니다. 그가 강신술에 열중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아들 ‘레이몬드’가 죽었을 때 그와 이야기를 하고 나서부터라고 하는데, 강신술의 매력이 얼마나 강하다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한국에도 이런 단체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마귀는 세계 어디서든지 각계각층의 이름난 인사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지식층을 통하여 자기의 계획을 추진시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진리를 찾고 진리대로 살고자 하는 자들은 십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현대 강신술 
  창세기를 보면 그리스도와 사단과의 사이에 있을 큰 싸움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이미 예언하시기를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세기 3장 15절)고 하셨는데, 이 싸움은 지금 마쳐가고 있습니다. 마귀는 오래 전부터 간직해 두었던 강신술이라는 무기를 사용해서 최후의 대결을 해보려 합니다. 마귀는 사람이 어떤 짓을 해도 그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로마서 6장 23절), “죄는 불법이라”(요한일서 3장 4절)고 말씀하십니다. 불법은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마귀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요한계시록 12장 17절) 최대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는 오직 계명을 지키는 사람, 계명을 어기고 범죄하면 죽는다고 믿는 사람들만을 원수로 삼으니, 계명에 대하여 중요시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몇 천만이 있다 하여도 문제삼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시대가 되면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태복음 24장 24절)고 하셨으며,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린도후서 11장 14절),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요한계시록 13장 13절),“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라”(데살로니후서 2장 10절)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사실이 나타남을 볼 때에 이것이 곧 사단의 최후의 발악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디모데전서 4장 1절)는 예언도 있거니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강신술을 따르게 될 가능성이 있으니, 이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영혼의 사후 승천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마지막 날에 우리는 어느 편을 택할 것입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것입니까? 아니면 사단의 속임수를 받아들일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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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린도전서 10장 31절).

  우리는 그동안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리를 대강 공부하였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다시 말해서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어떠한 생활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라 하는 문제를연구하기로 합시다. 이것이야말로 실제적인 문제요, 처음으로 그리스도교를 연구하는 이로서는 퍽 관심을 가질 만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으나 우선 가장 중요한 세 가지만 들어 말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신뢰의 생활, 둘째는 순종의 생활, 셋째는 절제의 생활입니다.
 

신뢰의 생활 
  예수께서는 모든 불쌍한 인류를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장 28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평안한 쉼을 얻고자 하는 자들은 반드시 예수께로 나아가야 할 것이요, 찾아 나아가서 그의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한복음 14장 1절)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의 생활은 근심과 걱정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근심하지 않을 수 있느냐 하면, 그것은 신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문제에 대하여 분명히 이르기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베드로전서 5장 7절)고 하였습니다. 권고하심이란 모든 것을 돌보아 주신다는 뜻이니, 베드로는 자기의 깊은 신앙 체험에서 얻은 바를 신도들에게 가르쳐 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께서 나의 필요를 다 아신다.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고 계신다’ 하는 신념이 확고하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번은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8장 3절)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어린아이들과 같이 순전하고 솔직하고 겸손해야 할 것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린아이가 그 부모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오직 그만 믿는 것처럼 단순성을 가져야 할 것도 의미하신 말씀입니다. 어린아이가 그 부모의 손목만 잡으면 어디를 가나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모든 것을 예수께 맡기고 그의 도우심과 돌보심을 믿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장 25~33절).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의식주의 일상생활을 위해서 염려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의 의(義)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에는 일상생활의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실 것을 허락하셨고 또한 그들은 그 허락을 일상생활에서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징조 
  그런데 신뢰의 생활은 기도의 생활과도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기도는 신앙생활에 있어 호흡과 같은 것입니다. 호흡이 생명인 것처럼 기도 없이는 신앙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명상과 기도는 곧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우리의 사정을 하나님께 고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시간이 곧 명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기도가 신앙생활에 그처럼 필요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신도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데살로니가전서5장 17절)고 권면하였고, 예수께서도 산상보훈 가운데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태복음 7장 7, 8절)고 하셨습니다. 진정으로 구하는 사람은 진정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영국의 ‘조지 뮬러’라는 사람은 오직 기도로써 세 고아원을 경영하여 5,200명의 고아를 양육했고 또한 학교를 세워 6만 명의 학생을 교육시켰으며, 60만 부의 성경 단편과 6천만 부의 전도지를 전하였습니다. 기도의 생활은 실로 위대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기도를 드려야 할까요?  
  “기도는 친구에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그 심정을 펴놓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심정을 그에게 토로할 필요가 있다. 신령적 생명과 활력을 얻으려면 우리는 반드시 하늘 아버지로 더불어 실제적 교제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실생활에 관하여 그에게 무엇을 말하여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 그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할 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는 저들의 매일의 필요를 하나님 앞에 제출하고 저들의 모든 염려를 당신에게 맡기라고 밝히 말씀하셨다”(정로의 계단, 119, 120).  
 

순종의 생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이 아무리 훌륭한 진리일지라도 그것을 알기만 하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어떤 중환자가의사의 진찰을 받고도 그의 치료 방법을 따르지 않는다면 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죄의 병에 걸린 사람은 그리스도의 피를 약으로 마시고 성경의 가르침을 치료 방법으로 삼아 그 주의 사항을 충실히 따라야만 할 것이니, 그밖에는 어떠한 값비싼 약품이나 처방이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장 21절)고 하셨습니다.
  순종하는 일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주의 임하시는 날에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마태복음 7장 22절)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가 불순종했기 때문에 예수께서 밝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태복음 7장 23절)고 하실 것입니다. 불법이란 하나님의 계명을 불순종하고 지키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주여 주여” 하고 믿는다고 하던 자들이 이러한 변을 당한다는 것은 얼마나 통탄할 일입니까? 세상 사람의 안목으로는 좋은 품성과 훌륭한 인격을 가진 듯이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혹은 사람의 칭찬과 인기를 얻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교훈에 따라 계명을 준행하지 않는 자는 참으로 순종하는 자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참된 신앙은 경건한 태도나 감정이 아니요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잘 알고 신학에 능통하다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으면 참으로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한일서 2장 3~5절).  
  그러므로 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자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이론과 철학의 종교가 아니라 목표를 향해서 달려 나가는 실천의 종교입니다. 즉 하늘 본향을 향해 나아가며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고 실행하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오해하고 항상 죄 가운데서 생활할지라도 믿기만 하면 그 죄가 사함을 받고 구원함에 이를 줄 알지만, 거듭남의 경험을 얻지 못하고 품성의 변화를 이루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도 없고 구원함에 이를 수도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한복음 15장 10절)고 하셨으며, 사도 바울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장 8절)고 하였습니다. 과연 예수께서는 죽기까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시어 우리에게 완전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그의 발자취를 따라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라는 것도 결국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동안, 즉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범위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순종하는 일을 밀어주고 뒷받침해 주는 것은 날마다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품성을 변화시키고 고집스런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순종할 수 있게 만듭니다. 성경을 순서대로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초보자라면 시편이나 잠언, 전도서, 요한복음, 마태복음, 산상보훈(마태복음 5~7장) 같은 것들을 먼저 읽는 것이 이해하기에 쉽고 성경에 흥미를 느끼게 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절제 생활 
  다음은 절제에 관해서 생각해 봅시다. 그냥 절제라고 하면 범위가 너무 넓습니다. 즉 마음의 절제, 육체의 절제, 생활의 절제, 시간의 절제, 금전의 절제 등 온갖 절제가 필요합니다. 절제 없는 생활은 마치 제동기 없이 달리는 자동차와 같아서 위험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사람은 반드시 마음과 몸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마음과 몸을 조절하며 사는 생활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생활 태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르기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린도전서 9장 25절)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썩어 없어질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경주하는 자들도 그 몸의 능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최선의 절제를 행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얻으려는 우리는 그보다 더 절제하고 근신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절제하는 생활을 하려면 먼저 마음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솔로몬은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언 16장 32절)고 하였거니와 과연 성내는 것을 제어하고 욕심을 억제할 줄 아는 사람이면 참으로 용사보다 나은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등한한 마음이나 게으름이 생길 때 마음의 허리를 단단히 동이는 것, 불의한 생각이 들고 그릇된 오락이 마음을 끌 때 그것을 억제하는 것, 이런 것이야말로 훌륭한 절제입니다. 이런 일이 비록 작은 일 같으나 하나님께서 성을 쳐서 승리하는 개선장군의 승리보다 더 가치 있게 인정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몸을 위해 절제 생활을 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르기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리도전서 6장 19, 20절)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것이며 성령이 거하시는 처소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대로 방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소유주를 기쁘시게 하고 영광스럽게 하기 위하여 사용되어야 합니다. 항상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절제하며 또한 몸도 깨끗하게 가지고 절제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과 몸이 건전해서 진리 안에서 충분한 발달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몸을 건강하게 보전하기 위하여 각별한 주의를 해야 합니다. 건강의 비결은 곧 절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먹는 것과 입는 것과 자는 것과 일상생활을 규칙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음식물은 건강 생활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건강에 해로운 온갖 음식은 제거하거나 절제해야 합니다.  
 

 건강을 위한 음식
  태초에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위해 준비해 주신 것은 동물성 식품이 아니라 식물성 식품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창세기 1장 29절).  
  즉 채소와 곡식과 과실을 가장 이상적인 식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원칙은 오늘날도 변함이 없습니다. 육식은 노아 홍수 후에 어쩔 수 없이 사용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육식의 결과로 사람들의 성격이 조급하고 사나워졌으며, 수명도 심히 단축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육식에는 여러 가지 독소들이 있어서 사람들의 건강에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육식 중에서도 사람의 건강에 아주 해롭고 독성이 많은 것은 부정하므로 먹지 말라고 금하셨습니다. 
  레위기 11장에 보면, 소나 양, 염소나 노루, 사슴 같은 짐승은 깨끗하니 먹어도 좋고, 돼지나 토끼, 약대 같은 것은 부정하니 먹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또 물고기 중에서는 비늘이 있고 지느러미가 있는 것만 먹고 다른 것은 다 부정하다고 하였으며, 새 중에는 비둘기나 꿩, 메추라기, 참새 같이 깨끗한 곡식만 먹는 것은 정한 것이요, 독수리나 매 종류, 까마귀, 올빼미, 황새 등 육식을 하는 새는 부정하다고 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쥐나 박쥐 같은 것은 부정하다고 했으며, 개도 가증한 것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기호물 가운데 술, 담배, 마약류, 커피, 차 같은 것들은 습관성을 만들고 신경을 흥분시키는 것들이므로 뇌와 심장, 신장 등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칩니다. 더구나 담배는 폐암의 원인이 되므로 극히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절제의 능력
  우리는 마음과 생활과 식욕과 기호를 절제해야 할 줄 알면서도 그렇게 못하는 수가 많습니다. 가령 술이나 담배 등의 기호품은 끊어버리려고 몇 번 결심해도 잘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의 의지나 능력으로는 그것을 끊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를 지배하게 될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장 13절)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승리를 거두는 방법은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의 능력을 받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기도와 성경 연구를 계속하는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얻어지는 결과입니다.




2010.12.27 15:47

제 19과 침례와 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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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사도행전 2장 38절)

  구약 시대에는 여러 가지 의식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 침례식과 성찬식이 대표적 예식으로 거행됩니다. 이것들은 예수께서 친히 명령하시고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침례’(浸禮)라고 한 용어는 성경에 ‘세례’(洗禮)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세례’라는 용어는 근본 뜻을 바로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침례’라고 고쳐 사용합니다. 자세한 뜻은 아래에서 설명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 제자들을 모으시고 이러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장 19, 20절).  
  이 위대한 사명은 당시의 제자들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후일의 모든 제자들에게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명령을 따라 온갖 위험과 박해를 무릅쓰고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고 믿는 자들에게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이것은 교회에 들어오는 문이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의식입니다.  
 

침례를 받기 위한 준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침례를 받으려는 자는 먼저 성경의 모든 진리를 충분히 배워야 할 것이요 성경의 가르침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구주로 믿어야 합니다.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마가복음 16장 16절)고 하였으니 믿는 것은 구원의 첫째 조건이 됩니다. 즉 예수께서 내 죄를 대신하셨으니 나의 구속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 다음은 죄를 회개하고 죄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사도행전 2장 38절)라고 하였습니다. 회개는 죄를 알고 죄를 통회하고 고백하며 죄에서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께 대하여서만이 아닙니다. 자기로 인해 해를 당한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로 가서 자기의 허물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성경의 진리를 잘 알고 예수의 구원하심을 믿고 죄를 회개할 수 있는 연령에 달한 사람이 이런 경로를 통하여 침례받기를 결심하면, 목사는 그에게 침례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알지도 못하는 유아나 갓난아기에게 세례를 주는 실례도 있는데, 이것은 옛날 우상숭배자들 사이에서 행해졌던 풍습을 기원후 수백 년 뒤에 로마교회가 채택한 것으로, 성경의 가르침과는 전혀 부합되지 않습니다.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의 생명은 예수님의 사랑의 손안에 있다고 믿는 것이 타당합니다.  
 

침례를 어떻게 받아야 합니까?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침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에베소서 4장 5, 6절).  
이 성경 말씀에서 침례의 방식이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어떠한 모양으로 침례를 받으셨습니까? 마태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태복음 3장 13~17절).  
  예수께서 받으신 침례의 방식이 올바르고 유일한 방식인데, 그는 요단강에 나아가서 물에 잠기는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침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같이 그 위에 임하였으며, 또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태복음 3장 17절)는 소리가 나서 예수의 침례 받으신 것을 승인하는 표시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정당한 침례 의식을 행하는 데는 물이 많아야 합니다.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침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침례를 받더라”(요한복음 3장 23절).  
  그러므로 오늘날 많은 교회가 행하는 몇 방울의 물을 머리 위에 떨어뜨리는 세례 의식은 성경적인 정당한 형식이 아닙니다.  
 

빌립이 베푼 침례 
  예수께서 승천하신 지 수년 후에 주의 사자가 전도자 빌립에게 이르기를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사도행전 8장 26절)고 하였습니다. 빌립이 곧 떠나서 길을 가다가 예배드리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났습니다. 그는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재산을 관리하는 고관이었는데, 빌립이 수레 가까이 갔을 때 이사야의 예언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빌립이 “읽는 것을 깨닫느뇨”라고 물으니 그가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마차에 올라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아래와 같이 읽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이사야서 53장 7, 8절).  
  성경을 읽던 내시가 빌립에게 묻기를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사도행전 8장 34절) 하니, 빌립이 입을 열어 이 성경 말씀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거 하였습니다. 그 때에 내시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침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사도행전 8장 36절)라고 하였습니다. 빌립이 대답하기를 “네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가하니라” 하니, 내시가 가로되 “내가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줄 믿노라”(사도행전 8장 37절 각주)고 하였습니다.  
  이에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침례를 주고 둘이 물에서 올라왔습니다. 이 형식은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받으신 침례의 형식과 똑같습니다. 즉 온몸을 물속에 잠그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 ‘세례’라고 번역된 것은 원어의 ‘밥티스마’(Baptism)인데, 그 뜻은 잠근다는 것이요 씻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물 몇 방울을 머리에 떨어뜨리는 형식은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린이들과 병자를 위하여 기원후 8세기경부터 로마교회에서 시작된 것으로12세기 이후에 일반화되었습니다. 
 

침례의 의미 
  사도 바울은 침례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로마서 6장 3~7, 11절).  
  침례 의식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지냄과 부활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믿고 장사지내고 부활함을 표상하는 것입니다. 즉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주께서 자기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을 믿음으로 과거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모든 더러움에서 깨끗함을 입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육신을 주와 함께 물 가운데 장사지냄으로 죄와 세상에 대하여는 죽은 자가 되어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않을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물에서 올라올 때에 그는 새로 태어난 사람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침례는 죄인이 죄로 죽어 장사지낸바 되고 새 사람으로 다시 살아날 것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공포하는 것입니다.
 

 침례받는 자의 새 생활
  침례는 거듭남의 상징이요 또한 그 경험입니다. 그러므로 침례를 받은 후의 생활은 그전 생활과는 달라야 합니다.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되었으므로 마땅히 새 생활을 해야 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로새서 3장 1, 2, 5, 8~10, 12~14절).  
  이상과 같이 침례를 받고 교회에 입교한 자는 예수의 제자로서 합당한 품성을 가지고 일상생활을 해야 합니다. 언어 행동은 말할 것도 없고, 의복이나 몸을 단장하는 일에 있어서도 극히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디모데전서 2장 9, 10절).   
  의복은 그것을 입는 사람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너무 누추한 모양을 하거나 너무 사치한 모양을 해서 사람의 눈을 끄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유행의 앞장을 서도 안 되지만 주목을 받을 만큼 너무 뒤떨어져서도 안 됩니다. 그 옷차림에서 그의 깨끗하고 고상하며 경건한 인격이 나타나야 합니다.  
  또한 오락이나 취미는 품성에 악영향을 주거나 시간을 낭비하게 하거나 마음에 거리끼는 것은 하지 말 것이요, 항상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만을 해야 할 것입니다.  
  독서도 하나님을 부인하는 위험한 사상이나 품성을 저속하게 만드는 소설이나 잡지도 피할 것이요, 연극, 영화도 멀리하는 것이 인생을 바로 걸어가는 데 안전할 것입니다. 
  또 라디오, 텔레비전 등도 프로그램을 잘 선택해서 듣지 않으면 모르는 사이에 좋지 않은 감화를 받을 염려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복음을 도구가 될 수도 있지만 사단이 죄악을 퍼뜨리는 데 힘 있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이 다 그리스도인 생활에 적당치 못하다고 하면, 그리스도인 생활은 매우 우울하고 무미건조한 것처럼 생각되기 쉬우나 결코 그런 것은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희망과 기쁨과 즐거움이 그의 마음을 점령하게 됩니다.  
 

승리의 비결
  최후의 문제는 침례를 받고 교회에 입교한 사람이 어떻게 하여야 그 신앙생활을 잘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 성공한 바울은 그 비결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장 20절).  
  그리스도께서 내 속에 거하셔서 나를 주장하시게 하는 생활, 이것이 곧 승리하고 믿음을 굳게 하고 지켜 나아가게 하는 비결입니다.  
  미국의 종교 저술가 엘렌 G. 화잇 여사 역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악에 대한 유일한 방어는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내재시키는 것이다. 하나님과 산 연결을 맺지 아니하면 우리는 결코 자기를 사랑함과 자아 방종과 죄에 대한 유혹의 부정한 영향을 대항할 수 없다. 우리는 많은 악습을 버릴 수 있을 것이며 얼마 동안은 사단과의 관계를 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순간마다 자신을 굴복시킴으로 하나님과 산 연락을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복당할 것이다.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친숙하고 계속적으로 교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원수의 마음대로 마침내 그의 명령을 좇을 것이다”(영문 시대의 소망, 324).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산 관계를 꾸준히 계속하기 위해서는 아래 사항에 유의해야 합니다.  

첫째, 은밀한 기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날마다 성경을 연구해야 합니다.  

셋째,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은혜를 날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넷째, 교회의 모든 집회에 부지런히 출석해야 합니다.  

  그리고 같은 신앙과 소망을 가지고 사는 친구들과 밀접한 교제를 나누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비록 교회에는 나온다 하더라도 제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교제를 계속하게 되면, 악의 세력이 너무도 강하므로 유혹에 빠지기 쉽고 믿는 마음이 악화되기도 쉽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유의할 것은 이것이 옳다, 이것이 진리다 하는 확실한 깨달음을 얻었으면 하루라도 더 사단의 종이 되어 있을 필요가 없으므로 깨닫는 즉시 진리에 순종하기로 결심하고 침례를 받고 교회에 입교하는 것입니다. 입교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큰 군대에 가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능히 마귀를 대적할 만한 용기와 능력과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침례와 성찬 의식은 두 개의 기념하는 기둥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이 의식에 참 하나님의 이름을 새겨놓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침례를 당신의 영적 왕국에 들어가는 표로 삼으셨다”(교회에 보내는 권면 2권, 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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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디모데전서 3장 15절).    

  오늘날의 그리스도교는 수백 종의 교파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신도들은 각각 자기가 속해 있는 교회가 가장 정당한 교회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주장합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는 성경을 충분히 연구해 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그렇게 주장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내가 속해 있는 교회가 진정으로 참되고 바른 교회인지 아닌지는 다만 성경이 판단해 줄 것입니다.  
  어떤 이는 길은 여러 갈래이지만 가서 만나는 곳은 결국 한 곳이니 자기 형편대로 아무 교회나 택해서 다녀도 무방하다고 하며, 종교는 어느 교나 다 선(善)을 가르치니 구태여 남의 교회의 옳고 그름을 비평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오직 하나라고 말씀하셨고, 아무 길이라도 좋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한편 교회라는 데는 부정직한 사람, 위선자, 세속인과 다름없는 사람들도 다니는 곳이니 만큼 나는 차라리 혼자서 성경을 읽고 믿으면서 살아가겠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어떠한 사람이라도 버리지 않고 받아들이시되, 당신을 배반한 유다까지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릇된 교리에 대해서는 엄격히 단속하지만 들어오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관대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구원을 얻으려면 꼭 교회에 가입해야만 하는가”라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라”(에베소서 1장 22, 23절)는 성경 말씀과 “만일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는 것과 같다”(요한복음 15장 4절 참고)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볼 일입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민적(民籍)에서 제적되는 것을 멸망으로 생각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들은 교회에서 떠나는 것을 절망에 빠지는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구원을 얻기 위하여 다녀야 할 참 교회는 어느 교회입니까? 오늘날과 같이 교회가 수백 종으로 나누인 것을 예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을 한 교회로 모으려 하십니다. 혼란 상태에 있는 교회들 중에서도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으니, 주께서는 저들을 지극히 사랑하사 바른 길을 걷도록 도와주십니다.  
  자! 이제 참 교회가 어떤 것인지를 알기 위하여 초대교회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 교회가 어떠한 경로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상고해 봅시다.    
 
사도 시대의 교회
  그리스도 당시의 교회는 순수한 참 교회였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절에는 이 시대의 교회를 “해를 옷 입고 발아래는 달이 있고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쓴 여자”로 묘사하였습니다. 해를 입은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과 영광을 상징하고, 발아래 달은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의 빛을 반영하는 구약의 희생 제도를 상징한 것으로, 마치 달이 햇빛을 받아 희미하게 반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열두 별의 면류관은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이 여자는 구약 시대가 지나고 막 신약 시대에 접어든 교회를 표상합니다. 이것을 보면, 신약 시대의 신앙은 구약 시대의 신앙을 토대로 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 성경을 경시하고 읽지 않아도 좋다고 하는 교회는 진리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요, 따라서 바른 진리를 가지고 있지도 못한 것입니다.  
 

 박해 중에 이루어진 교회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처음부터 박해로 시작되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교가 참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다면 박해로 소멸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박해가 있을수록 그리스도교는 더욱 전파되어 바울 시대에 이미 소아시아에서 유럽 전역에까지 널리 퍼졌습니다. 그런데 박해로써 그리스도교를 멸절시킬 수 없음을 안 마귀는 다른 교묘한 방법으로 도전해 왔습니다. 즉 교회 내부를 부패 타락시킴으로써 참 교회가 가지고 있는 진리의 빛을 소멸시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 결과, 교회 안에 나타난 불법의 기미가 점점 세력을 얻어서 마침내는 타락한 로마 가톨릭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계시를 주신 바와 같이 참 교회를 그 위험 가운데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이백육십 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 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벰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여자의 뒤에서 벰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요한계시록 12장 6, 13~16절).  
  여기서 말한 1260일, 한 때 두 때 반 때는 곧 3년 반, 가톨릭교회가 참 교회를 박해한 기원후 538년부터 1798년까지의 1260 년간입니다. 가톨릭교회는 교황이 사도 베드로의 계승자라고 말하고, 영국교회(성공회)의 감독은 사도 시대로부터 사도직을 계승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참 교회(여자로 표상됨)는 1260 년간 광야로 도망하였다고 합니다. 도시가 아닌 광야로 피난해서 거기서 간소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교황은 화려 찬란한 중에서 1260 년간 최상권을 가지고 세계를 호령하였습니다. 그동안 이 세상은 암흑으로 덮였었지만 진리의 빛은 여전히 보전되었습니다. 
  그 일례로 왈덴스파 신도들을 들 수 있는데 그들은 중세기 암흑시대 동안에 성경을 읽고 말씀을 전하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직접 그리스도의 도(道)를 배울 수 있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가톨릭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지적되고 핍박을 받아, 이탈리아 북서부에 있는 험준한 계곡에서 은거 생활을 하며 그들의 독실한 신앙을 유지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을 신앙적으로 교육하였으며, 성경 단편들을 베끼는 일과 전도자들을 유럽 각지로 파송하여 성경 단편들을 전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뿐만 아니라 알비겐스파 신도들도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알프스 서남부에서 피난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런 일들이 있은 지 수세기 후에 북미대륙이 발견되어 유럽 각지에서 가톨릭 혹은 국교의 박해를 받던 많은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피난처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성경은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요한계시록 12장 16절).  
 

종교 개혁과 박해가 그침 
  위에 기록한 성경 구절 가운데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갔다”(요한계시록 12장 14절)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명기 32장 11절의 말씀과 대조해 볼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실 것을 상징한 것입니다.  
  과연 예언의 말씀과 같이 16세기에 접어들면서 ‘마르틴 루터’(독일), ‘츠빙글리’(스위스), ‘멜랑톤’(독일), ‘칼빈’(프랑스), ‘녹스’(스코틀랜드) 등의 종교 개혁자들이 일어났고, 북미 신대륙이 발견됨으로써 그렇듯 심했던 가톨릭의 박해도 꺼지기 시작했습니다. 또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등 여러 나라에서는 신앙의 자유를 법적으로 인정하게 되어 드디어 박해가 그쳤습니다. 
  그런데 박해는 예언상의 박해 기간(기원후 538~1798년)이 채 마치기 전에 그쳤는데, 이것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마태복음 24장 22절)고 하신 예언대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섭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교파들이 생김 
  어느 시대에나 성경의 중요한 진리가 소홀히 여기는 바 되거나 잊어버리는바 되면 하나님께서는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들을 일으켜 그 진리를 큰 소리로 외치게 하셨습니다. 16세기의 종교 개혁자들도 역시 같은 이유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저들은 복음의 근본 도리에서 떠난 가톨릭교회를 개혁하려고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들의 호소를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파문(출교)시켰으므로 개혁자들은 할 수 없이 가톨릭에서 떨어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프로테스탄트’(항의자라는 뜻), 즉 신교도라는 칭호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오래지 않아서 어떤 지도자들은 저희들의 마음대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진리만을 강조하게 되어 그 결과로 신교도들 사이에도 신앙 상 차이가 생겼으며, 따라서 교파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영국에서는 처음에 신교(新敎)로서 영국 교회(聖公會)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국 교회에는 여러 가지 가톨릭식의 예배 절차와 의식이 남아 있었으므로 거기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시 나누어져 저희 생각대로 독립된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영국과 유럽에서 생긴 침례교는 복음을 전하는 일 외에 침례, 영혼의 자유, 교회와 국가의 분리 등을 강조하였습니다. ‘존 웨슬레’와 그의 협력자들은 성결과 자유의 은총을 말한다 하여 비난을 받고 영국 교회로부터 내쫓겨서 부득이 다른 교파(감리교)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세기 초엽에는 순리주의와 고등비평이 기독교 안에 널리 침투되어 성경의 영감설을 비롯하여 그리스도의 신성, 처녀 탄생, 죄 없는 생애, 속죄, 부활, 승천, 하늘의 제사장직, 재림 등의 중요한 진리를 부정하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다시 용기 있는 지도자들을 일으켜 옛날의 성도들이 전한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또한 몇 개의 교파가 생기게 된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수백 종으로 나누인 각 교파는 대개 참된 의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어느 것이든지 귀중한 진리를 가지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의 전부를 믿고 실행하느냐 아니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만일 그러한 교회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 교회야말로 하나님의 참된 교회라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남은 교회
  앞에서 연구한 바와 같이, 참 교회는 1260 년간 박해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박해 기간에도 당신의 참 교회를 버리지 않고 지켜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소멸되지 않고 남은 그 참 교회는 계속하여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남은 참 교회는 어떠한 특징을 가질 것이라고 하였습니까? 성경에는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요한계시록 12장 17절)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귀가 공격하려고 하는 교회는 두 가지 분명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다음은 예수의 증거를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제칠일 안식일을 포함한 십계명을 말하는데, 오늘날의 허다한 교회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율법이 폐지되었다 하여 넷째 계명을 소홀히 여기고 있습니다. “예수의 증거를 가진 것”은 요한계시록19장 10절을 보면,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구역 예언의 신)이라 하였습니다. “대언의 영” 즉 “예언의 신”을 가지는 것, 다시 말해서 선지자를 가지는 것은 남은 교회의 특징이 됩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런 교회에 대하여 분노하여 싸우려고 도전해 온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남은 교회는 다시금 가톨릭의 박해에 직면하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에 남은 교회
  하나님께서는 시대에 따라 종교 개혁자들을 세우셔 그 때 그 때에 필요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와 같이 최후의 남은 교회에도 중요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곧 세 천사의 기별을 전하는 것입니다.  

  첫째 천사(요한계시록 14장 6, 7절)는 심판하실 때가 이르렀다는 것과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는 것, 다시 말해서 예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것과 제칠일 안식일을 지킴으로 창조주를 경배하라는 기별을 전합니다.  

  둘째 천사(요한계시록 14장 8절)는 바벨론이 무너졌다고 외칩니다. 즉 진리를 떠난 교회들의 혼란과 타락한 상태를 지적합니다.  

  셋째 천사(요한계시록 14장 9~11절)의 기별은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리라는 것이니, 곧 교황권의 세력과 교황권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생기는 종교 연합체를 따르고 그들이 법령으로 일요일 준수를 강요할 때 거기 응하는 자들은 형벌을 받으리라는 가장 엄숙하고도 최후적인 기별입니다.  이상과 같은 세 천사의 기별은 지금 전 세계 방방곡곡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가톨릭교회로 말미암아 왜곡되었던 복음의 진리가 바로잡혀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초대 교회가 가졌던 순결한 신앙을 회복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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